READING ROOM
정말 감사합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오늘 밤 이곳 댈러스에 오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이 텍사스주에 다시 오기를 참으로 큰 기대를 품고 고대해 왔습니다. 얼마 전 워털루에 있을 때 린지 형제님을 만났는데, 형제님이 이곳 치유의 음성 대집회에 저를 초청해 주셨습니다. 나중에 채터누가에서 우리의 사랑하는 친구 데이비드 뒤플레시 형제님을 만났는데, 그분도 제가 와서 이 대집회에 참여하도록 격려해 주셨습니다. 혹시 있을지 와서 보라고… [녹음에 날카로운 잡음이 남.]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엿새 저녁에 제가 말씀을 전하도록 청해 주시니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제가 정확히 알지 못해서 그중 한 번을 놓쳤습니다… 그 집회는 오후에 열리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도시에 너무 늦게 도착해서 오후에 말씀을 전하러 이곳에 오지도 못했으니 죄송합니다. 하지만 오늘 밤 이곳에 와서 이 치유의 음성 대집회에 함께하게 된 것은 참으로 영광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 이상으로 심히 넘치도록 베풀어 주실 것을 믿고 있습니다.
방금 차를 타고 도착하면서 비디아르 형제님의 말씀을 들었는데, 핀란드로 가신다고 하신 것 같습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 주님께서 곧 오실 것을 믿습니다. 지금 우리는 들판에 남아 있는 것을 거두어들이고, 이삭을 줍고 있을 뿐입니다. 아마 들판의 룻처럼 말입니다. 구원받을 수 있는 것, 하나님께서 영생을 정해 두신 것을 거두어들이려 애쓰고 있습니다. 왕께서 오시기 바로 직전인 지금, 우리가 사람이 살아온 날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시대 중 하나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참으로 기쁩니다.
이번이 제가 댈러스에 온 세 번째인 것 같습니다. 한 번은 어떤 목사님과 함께했는데,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분 성함이 고프 형제님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근처, 아마 댈러스 시내에 작은 교회가 있었지요. 또 한 번은 이곳 어떤 경기장인가에 왔었는데, 그곳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페어 파크라고요. 예, 맞습니다. 그래서 이번이 세 번째인 것 같습니다. 오늘 밤 이곳에 오게 되어 기쁘며, 주님의 뜻이라면 금요일 밤까지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훌륭한 목사님들 앞에서 저녁 말씀을 전하려니, 그저 남부에서 말하는 새서프래스 시골 설교자인 저는 확실히 좀 어울리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 작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새서프래스가 무엇인지 아시는 분이 몇 분이나 됩니까? 이런, 켄터키 어느 지역에서 오셨습니까? 이렇게 우리가 이곳에 올라와 훌륭한 목사님들 앞에서 말씀을 전하고 저녁 설교를 맡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기분 좋은 일입니다. 이곳의 많은 분은 제가 경마를 하거나 어디 권투장 주변을 돌아다니던 죄인 소년이었을 때 이미 현장에서 말씀을 전하고 계셨습니다. 제가 평탄한 길을 달려갈 수 있도록 그분들이 앞서 길을 닦아 주셨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오늘 밤 저는 제 형제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제가 기울일 수 있는 작은 노력이 모두에게 복이 되기를 바랍니다. 죄인이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하고,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하게 하며, 병든 이가 치유자께서 계심을 알게 하고, 제 형제님들이 힘을 얻어 어느 때보다 더 큰 기대를 품고 전진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 저는… 물론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저는 아직 한 번도… 저는 선교사 침례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선교사 침례교회를 떠난 뒤로는 어떤 교회, 어느 특정 교단에도 소속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들 모두의 틈새에 서서 “우리는 형제입니다”라고 말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것이 옳다고, 우리가 형제라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특정 교단의 교회를 대표하지 않습니다. 저는 교회,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대표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바로 그곳, 그리스도의 위대한 몸에 속해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께서 자신의 교회를 휴거시켜 본향으로 가실 그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님의 뜻이라면 이번 주에 그 가운데 몇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교회가 떠날 때의 말뚝」, 「벽에 쓰인 글씨」, 「하나님 아래 하나 되어」와 같은 주제 몇 가지를, 주님의 뜻이라면 이번 주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이것이 참된 기초라고 믿습니다. 바로 성경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많은 일도 행하신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이시므로 무엇이든 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리는 성경에서 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책이기 때문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그것이 진리인지 아닌지 알 수 있는 방법이 두세 가지 있었습니다. 곧 우림과 둠밈이라고 부르는 것에 가서 알아보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듣기로는 아론이 착용했던, 열두 보석이 박힌 가슴받이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선지자가 예언하거나 꿈꾸는 사람이 꿈을 말했을 때, 이 우림과 둠밈에서 여러 빛이 한데 어우러져 반짝이지 않으면 그 선지자가 틀린 것이었습니다. 아시겠습니까? 하나님께는 언제나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응답하시는 길이 있었습니다. 아시겠지요? 언제나 진리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번쩍이지 않으면 선지자가 틀린 것이었습니다.
이제 그 제사장직이 폐지된 뒤… 오늘 밤 우리에게는 새로운 제사장직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이십니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우림과 둠밈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빼거나 더하는 자는 생명책에서도 제하여지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최선을 다해 이 성경의 말씀 안에 머물겠습니다. 제가 자주 말해 왔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성경에 두신 것보다 조금이라도 덜 받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에 두신 모든 것을 원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모든 약속을 원합니다.
이제 본문을 읽으려고 그분의 말씀을 펼치기 전에 잠시 머리 숙여 기도하겠습니다. 영원하시고 찬송받으실 하나님, 오늘 밤 이 큰 천막 아래, 주님의 자녀들이 오직 말씀을 듣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움직이심을 보려는 목적으로 함께 모인 이곳에서 주님의 거룩한 임재 가운데 서게 된 것은 참으로 크나큰 특권입니다. 오늘 밤 저희에게 주님의 복을 풍성히 부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주님, 저희의 생각하는 방식이 잘못되었다면 바꾸어 주시고, 저희의 생각이 주님의 아들 주 예수님을 향하게 해 주십시오. 저희 마음이 그분의 임재로 가득 차게 하옵소서. 오늘 밤 집회를 마치고 떠날 때 엠마오에서 돌아온 이들처럼 “그분께서 길에서 우리와 말씀하실 때에 우리 마음이 우리 속에서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말하게 하옵소서. 이제 아버지, 성령께서 곧 읽을 이 몇 마디 말씀을 취하시고 그 안에 담긴 뜻을 각 사람의 마음에 부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주님, 허락해 주십시오. 아버지, 제가 이곳에 서 있을 때 저를 도와주시어 제 혼이 주님의 복된 임재 안에서 기뻐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구합니다. 아멘.
오늘 밤 이 대집회에서 제가 맡은 말씀을 시작하면서, 요한계시록에 있는 짧은 본문을 택했습니다. 표시하실 분들은 요한계시록 3장 20절입니다. 이 말씀을 읽고 싶습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 들어가 그와 함께 만찬을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으리라. 여기 이 요한계시록 본문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메시지입니다. 저는 참으로 이렇게 믿습니다. 제가 엄밀히 말해 세대주의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가 말씀에 언급된 이방인 경륜의 끝에 와 있다고 믿습니다. 또 라오디게아 교회 시대가 마지막 교회 시대라고 믿습니다. 저는 오늘 밤 우리가 바로 그 시대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본문으로 택했습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브래넘 형제님, 이만큼 많은 사람이 모이고 이 정도 규모인 대집회에서 쓰기에는 본문이 너무 짧지 않습니까? 성경의 짧은 한 절에서 몇 마디만 읽으셨잖습니까?”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성경 구절의 길이나 읽은 분량이 아니라, 그 말씀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 켄터키주 루이빌에서, 저와 친하게 지내는 어린 소년 하나가 집의 낡은 다락에 올라갔습니다. 그 소년은 이것저것 뒤지다가 낡은 궤짝을 발견했습니다. 그 궤짝에서 한 변이 겨우 반 인치쯤 되는 낡은 우표를 찾아냈습니다. 아이는 이 우표로 아이스크림을 사 먹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길을 따라 서둘러 낡은 우표를 수집하는 친구에게 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작고 누렇게 변한 낡은 우표를 찾았어요. 꽤 오래됐는데, 이 우표가 값어치가 있을까요?” 우표 수집가는 확대경을 꺼내 잠깐 살펴보더니 곧바로 말했습니다. “이 우표를 주면 1달러짜리 지폐를 주마.” 물론 그 소년은 5센트 이상은 기대하지 않았으므로… 거래는 금방 이루어졌습니다. 1달러면 아이스크림콘을 많이 살 수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얼마 뒤, 약 2주 후에 그 수집가는 바로 그 우표를 2,500달러에 팔았습니다. 또 약 6개월 후에는 그것이 50만 달러에 팔렸습니다. 보십시오. 중요한 것은 그 조그만 우표, 작은 종잇조각이 아니라 그 종이에 무엇이 쓰여 있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밤 제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요한 것은 말씀이 적힌 종이도, 본문의 길이도 아니라 거기에 무엇이 적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토록 중요한 것이어서 하늘과 땅은 모두 없어질지라도 그 말씀은 결코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읽는 작은 말 한마디도 모두 눈여겨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생각을 스치는 작은 생각 하나하나와 우리가 하는 작은 행동 하나하나를 아십니다.
저는 이런 생각이 듭니다. 교회가 느슨해져서, 우리가 행동과 말을 저울질해야 하는데도 곧잘 분별없이 행동하고 생각하며 모든 것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하기 전에 곰곰이 생각해야 합니다. 남부 출신이신 제 어머니는 제게 “두 번 생각하고 한 번 말해라” 하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하지 않고 지나친 작은 일들이 우리에게 참으로 큰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처럼 신경이 곤두선 시대에 살면서 너무 서둘러 모든 것을 훑고 지나가려 합니다. 오늘 밤 하나님의 교회인 우리는 잠깐 멈추어 기다리며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 마땅합니다.
얼마 전 저는 브리티시컬럼비아주 밴쿠버에 있었는데, 영국의 조지 왕이 캐나다를 방문하러 왔습니다. 왕은 아름다운 왕비를 곁에 태우고 마차를 타고 거리를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저와 함께 일하는 분 가운데 한 분인 백스터 씨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브래넘 형제님. 우리 왕께서 지나가고 계십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존경받는 조지 왕이 지나간다는 이유로 캐나다 사람이 눈물을 흘린다면, 왕들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아름다운 신부인 교회와 함께 지나가실 때는 어떻겠는가?”
모든 학교에서 아이들이 나왔습니다. 교사들은 어린아이들에게 작은 영국 국기를 하나씩 주어, 왕이 지나갈 때 흔들며 충성을 나타내게 했습니다. 왕이 지나간 뒤 어느 학교에서 한 어린 여자아이가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은 놀라서 그 아이가 어떻게 되었는지 찾으려고 거리로 달려 나갔습니다. 거리를 살펴보니 어린아이가 전신주 옆에 서서 서럽게 울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아이에게 다가가 말했습니다. “얘야, 왜 그렇게 울고 있니? 왕께 깃발을 흔들지 못했니?” 아이는 말했습니다. “아니요, 선생님. 왕께 깃발을 흔들었어요.” “그러면 ‘국왕 만세!’라고 외치지… 외칠 수 없었니?” “아니요, 선생님. ‘국왕 만세!’라고 외쳤어요.” “그러면 왕을 못 보았니?” “아니요, 선생님. 왕을 보았어요.” 선생님은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얘야, 왜 그렇게 울고 있니?” 아이는 말했습니다. “선생님, 저는 왕을 보았지만 제가 너무 작아서 왕은 저를 못 보셨어요.” 하지만 예수님은 얼마나 다르십니까. 여러분은 인명사전에 실린 사람일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대단한 책에 이름이 올라 있을 필요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누구든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을 보시며, 우리가 하는 작은 행동 하나하나를 아십니다. 여러분이 그분을 위해 하는 작은 일 하나하나,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를 그분은 자신의 책에 기록해 두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중요한 사람이든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든, 그분은 우리 모두를 아십니다. 우리가 부유하든 가난하든 별다를 것 없는 사람이든, 우리는 모두 그분의 왕국에서 중요합니다. 보십시오. 이 말씀은 또한 사면장입니다. 작은 모임들에도 말입니다. 저는 오늘 밤 댈러스의 모든 밀주 술집을 문 닫게 할 만큼 충분한 성경 말씀을 읽었습니다. 서로 물어뜯는 모든 교회를 옛날과 같은 교제와 부흥으로 다시 돌아오게 할 말씀입니다. 그렇게 될 것입니다.
오래전, 더없이 고귀한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 시절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수용소에 한 죄수가 있었는데, 연방법을 어긴 죄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고 합니다. 어떤 선한 사람이 대통령을 찾아가 물었습니다. “이 사람을 사면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우리 모두 알다시피 링컨 대통령은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말했습니다. “각하, 그 사람에게는 죽을 혼이… 아니, 불멸의 혼이 있는데, 그것을 몸에서 떠나게 하시려 한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가 자비를 애원하는데도 목숨을 빼앗으시겠습니까?” 마차에 오르려던 링컨 대통령은 작은 종잇조각에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이 사람을 사면한다. 에이브러햄 링컨.” 그 사람은 재빨리 감방으로 달려가 말했습니다. “여보시오, 미합중국 대통령에게서 당신의 사면장을 받아 왔소.” 죄수는 그를 보며 말했습니다. “아, 그것이 진짜 사면장이라면 훌륭한 종이에 도장이 찍혀 있고 온갖 금빛 글씨가 있어야 할 거요. 대통령에게서 온 것이라면 말이오.” 그러고는 말했습니다. “내일 해 뜰 때 내가 총살당한다는 것을 알면서 왜 나를 놀리는 거요?” 그 사람은 말했습니다. “놀리는 게 아니오. 여기 에이브러햄 링컨의 서명이 있소.” 죄수는 “아, 그것만으로는 믿을 수 없소”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받기를 거부했고 다음 날 아침 총살당했습니다.
그런데 에이브러햄 링컨이 이 사람을 이날 사면하라고 쓴 사면장이 엄연히 있었는데도, 다음 날 총살대가 그를 죽인 것입니다. 이 사건은 연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았고, 판결은 이러했습니다. 사면은 사면으로 받아들여야만 사면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방금 읽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것을 사면으로 받아들이려는 이들에게는 사면이고, 치유로 받아들이려는 이들에게는 치유입니다. 또 그것이 얼마나 길든, 어떤 책에 쓰였든,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이기만 하다면 우리가 믿고 그렇게 받아들일 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어떤 큰 복도 될 수 있습니다.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성경에 나온다는 것은 참 특이한 일입니다. 문을 두드리시는 예수님의 유명한 그림을 그린 화가가 누구인지, 이름을 잊어버렸습니다. 이름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리스 화가였던 것 같습니다. 모든 위대한 그림은 명예의 전당에 걸리기 전에 먼저 비평의 전당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것을 보면 교회가 생각납니다. 교회가 영광 가운데로 들려 가기 전에, 먼저 비판하는 이 세상을 통과해야 합니다. 때로 우리는 비판을 피하고 뒤로 물러서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시험일 뿐입니다. 여러분에게 금덩어리와도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시험하시고, 빛나는 백 퍼센트 순금이 되어 나오게 하시려고 허락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모든 자는 핍박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판을 환영합니다. 불같은 시련을 통과하려면 그것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 화가의 그림이 비평의 전당을 거칠 때, 한 비평가가 말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이 그린 그리스도의 모습은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문 앞에 서서 누군가 문을 열어 주기를 바라며 지켜보고 기다리시는 그 기대에 찬 모습도 훌륭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 잘못된 것이 있습니다. 그분이 들어가실 수 있도록 문빗장을 그리지 않으셨습니다.” 화가는 말했습니다. “아, 저는 일부러 그렇게 그렸습니다. 보십시오. 이 경우 문빗장은 안쪽에 있습니다. 문을 여는 일은 당신이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두드리십니다.” 오늘 밤 이곳에서 하나님께 무엇이든 구하는 모든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께서는 문을 두드리고 계시지만, 문은 여러분이 열어야 합니다. 문을 열고 닫는 것은 여러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이 안쪽에서 문을 열어야 합니다. 구원이 필요하다면, 그분께서 두드리실 때 받아들이고 문을 여십시오. 치유가 필요하다면 문을 여십시오.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그것뿐입니다. 그러면 그분께서 들어오실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안으로 들어가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과 상의할 중요한 일, 또는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이 없이는 그 집 문을 두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시대마다 위대한 사람들이 문을 두드렸습니다. 예를 들어 옛 로마 시대에… 위대한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가 어느 농민의 집을 찾아가 문을 두드렸다면 어땠겠습니까? 그 농민이 문으로 나와 그 위대한 황제가 누구인지 알아보았다면,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말했을 것입니다. “위대하신 분이여, 위대하신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여, 제 집으로 들어오십시오.” 가난한 사람, 한 농민에게 로마 황제가 자신의 문 앞에 서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영광이었겠습니까. 대단한 영광이었을 것입니다. 또 지금은 죽은 아돌프 히틀러의 시대라면 어떻겠습니까? 아돌프 히틀러가 농민의 집이나 독일 보병, 어느 군인의 집에 가서 문을 두드렸다면 말입니다. 그 군인이 문을 열고 당시 독일의 위대한 총통이 자신의 문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면, 차렷 자세로 경례하며 말했을 것입니다. “오, 히틀러 각하, 제 집에 들어오십시오. 이 집에 있는 것 가운데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 각하의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히틀러가 독일의 독재자였던 그 시대에는 중요한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독일 사람에게는 그랬습니다.
또 이렇게 말씀드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위대한 대통령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오늘 밤 댈러스에 와서, 댈러스에서 가장 열렬한 민주당 지지자의 집을 찾아왔다면 그것은 여러분에게 영광이었을 것입니다. 물론입니다. 여러분은 그의 정치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미합중국 대통령입니다. 위대한 인물입니다. 중요한 것은 문 앞에서 두드리는 그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 인물이냐 하는 것입니다. 물론입니다. 그가 찾아와 문을 두드릴 때 여러분의 견해가 다르다고 해서 “잠깐만요, 아이젠하워 씨. 제 문 앞에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민주당 지지자입니다”라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를 안으로 모실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내일이면,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자신을 낮추어… (저는 그가 훌륭한 대통령이라고 믿습니다.) 그가 자신을 낮추어 평범한 사람인 여러분의 집 문 앞에 찾아온다면 텔레비전에서 그 소식을 전할 것입니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텍사스주 댈러스의 어떤 가난한 사람의 집을 찾아왔다는 것, 그렇게 자신을 낮추었다는 것을 내일이면 온 세계가 알게 될 것입니다.
또 얼마 전 이곳을 방문한 여왕이라면 어떻겠습니까? 영국 여왕이 캐나다로 갔다가 미국으로 내려왔습니다. 여기 계신 여성 여러분 가운데 한 분의 집 문 앞으로 여왕이 왔다면 어떻겠습니까? 어쩌면 여러분은 그 여인을 보고 “누구신지 모르겠는데요”라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 여인이 “저는 영국 여왕입니다”라고 말했다면, 여러분이 그 여왕의 신하는 아닐지라도 영국 여왕이 자신의 문 앞에 왔다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누구나 그랬을 것입니다. 여왕은 중요한 여성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여왕으로, 가장 위대한… 아마 세상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여왕이 영국 여왕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들어오십시오, 여왕님. 제 집을 둘러보십시오. 여기서 원하시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가지십시오.” 할머니가 여러분에게 주시려고 남겨 두었던 작은 장신구가 선반에 놓여 있었는데 여왕이 그것을 달라고 했다면, 여러분은 드렸을 것입니다. 그분의 신분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여성이니까요. 그 작은 보물을 영국 여왕에게 내어 드리는 것은 영광이었을 것입니다. 물론입니다. 그분이 중요한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형제자매 여러분, 제가 이곳에서 말씀드리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여러분의 문을 두드리시는 분 가운데 누가 예수님보다 더 중요합니까? 그런데 누가 예수님보다 더 많이 문전박대를 당합니까? 온 세계의 모든 대통령과 독재자와 왕들이 거절당한 것보다 예수님이 더 많이 거절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더 많이 문전박대를 당하셨습니다. 여왕이나 독재자는 여러분에게 무엇인가를 가져다주거나 여러분을 위해 무엇인가를 가져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의 문에 오셔서 무엇인가를 주고자 하십니다. 여러분이 받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 곧 영생을 주려 하시는데도 문전박대를 당하십니다. 아, 얼마나 비극적인 일입니까. 남자든 여자든 잠깐 멈추어 생각해 보기만 한다면 말입니다. 왕이신 주님, 생명의 왕,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죽을 인간의 마음을 두드리시며 좋은 것을 주려고 하시는데도 거절당하고 계십니다.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오늘 밤 여러분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믿음이 여러분의 마음을 두드리면 여러분은 그것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왜 걱정하겠습니까? 우리가 왜 “글쎄요, 그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봐 두렵습니다”라고 말하려 하겠습니까? 영광의 왕,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셨는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품을 수 있습니까? “내가 문 앞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말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들어가 그와 함께 만찬을 먹으리라.” 여기서 만찬을 먹는다는 것은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교제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교제를 원하십니다. 바로 그것이 오늘 밤 하나님의 마음이 간절히 바라시는 것입니다. 댈러스와 세계 곳곳에서 그것을 바라십니다. 편견을 허물고, 강단에서 지하실까지 모두 깨끗이 하며, 교단들을 흔들어 하나로 모으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참된 교회가 되게 하는 옛날과 같은 부흥을 바라십니다. 성결교인, 침례교인, 감리교인, 오순절교인, 나사렛교인이 서로 악수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자신의 백성 가운데 들어와 교제하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들어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여러분에게 좋은 것을 가져다주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교회와 사람들이 그분을 멀리합니다. 여러분은 “저 사람들은 나와 똑같이 믿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그분을 거절합니다. 그것이 무슨 상관입니까? 그것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는 같은 가족 안에서 다시 태어난 그리스도인들이며 한 무리의 자녀들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여 보고 변화되어 그분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아지기 전까지는, 모든 것에 의견이 같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허물어뜨리는 일, 깨끗이 하는 일, 집 안을 청소하는 일과 참된 부흥의 시작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성령의 은사와 권능과 나타나심이 교회 안에 임하여 큰 표적과 이적을 보일 수 있습니다. 분열된 무리 위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일을 하실 수 있겠습니까? 우리로서는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모두 큰 연합 집회로 함께 모이고, 침례교인이니 장로교인이니 하는 것을 잊어야 합니다.
그분은 모든 죽을 인간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그것이 그분의 일이며 그분이 이곳에 계시는 목적입니다. 아무도 빠뜨리지 않으십니다. 모두가 초대받았습니다. 몸이 불편한 사람, 다리를 저는 사람, 걷지 못하는 사람, 눈먼 사람 모두입니다. 오늘 밤 댈러스에 앉아 계신 여러분, 이곳의 모든 교회, 감리교, 침례교, 오순절교, 나사렛교, 필그림 성결교, 일신교, 이신교, 삼신교, 여러분이 무엇이든 그 작은 차이들을 허물고 함께 모이십시오. 그러면 이 근방 병원들이 텅 비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불명확한 말.] 아, 신문의 머리기사에 실릴 만한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댈러스의 가정들에 들어오실 때 텔레비전이 온 세계에 방송할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될 것입니다. 이 집회들이 지향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여기 강단에 앉아 계신 목사님들이 품고 계신 생각도 그것입니다. 제가 여기 온 목적도,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백성을 사랑하시며 성령의 움직이심과 교회의 휴거를 위해 여러분이 하나로 모여야 한다고 말씀드리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번 주에 그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여러분은 “브래넘 씨, 저는 오래전에 예수님을 모셨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분을 모셨다면 저는 그것이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분을 들여보내기만 하는 것과, 들어오신 뒤 그분의 뜻대로 하시게 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저를 집에 초대하여 제가 문을 두드린다면, 여러분은 저를 충분히 사랑하시므로 “들어오십시오, 브래넘 형제님” 하며 제 손을 잡고 “환영합니다”라고 하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여러분이 저를 환영한다고 하시면, 제게는 아직 켄터키 기질이 충분히 남아 있어서 그 집 안의 무엇이든 편히 누려도 된다고 믿을 것입니다. 신발을 벗고 침대 위에 길게 누워 쉬겠습니다. 배가 고프면 냉장고에 가서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겠습니다. 물론입니다. 환영한다고 말씀하시면 저는 환영받는다고 느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을 들일 때 다른 태도를 취합니다. 여러분은 말합니다. “예수님, 저를 지옥에 가게 하지는 말아 주십시오. 문 안으로 모시기는 하겠지만, 거기 문간에 계십시오.” 아시다시피 사람의 마음에는 그분이 첫 문을 지나 들어오신 뒤에도 사방에 작은 문이 많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몇 가지를 이야기해 봅시다. 여러분의 마음을 상하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몇 분만 이야기해 봅시다. 안으로 들어서서 오른쪽으로 돌면 나오는 첫 문, 그것은 사생활의 문입니다. 여러분은 말합니다. “예수님, 들어오셔서 저를 지옥에서 구해 주셔도 됩니다. 하지만 제 사생활에는 간섭하지 마십시오. 그러시면 저는 더 이상 주님과 함께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조금도 나아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형태의 침례나 교회의 의식 몇 가지는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들어오시기 시작해서 진영 안의 죄를 버리라고 하시면, 이제 더 이상 카드놀이를 할 수 없고 기도회가 열리는 아침마다 집에 남아 그 못된 아서 고드프리의 방송을 들을 수도 없으며, 집 안에서 엘비스 프레슬리의 로큰롤을 틀어 놓거나 뒷마당에 앉아 일광욕을 할 수도 없습니다. 집사들과 교인들이 담배를 피우고 그런 일들을 하는 것도 말입니다. 여러분이 그러니… 그리스도께서 마음속에서 마음껏 행하실 수 없는 것도 당연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상하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 오순절 교회의 도덕성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전에는 여성 여러분이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이 잘못된 일이었습니다. 저는 기억합니다. 그런데 이제 여러분은 “설교자님, 또 시작이군요. 그 문제를 건드리시는군요”라고 말합니다. 좋습니다. 여러분의 사생활이 어디에 있는지 아시겠습니까? 성경은 그것을 반대합니다. 할머니 시대에 성경이 잘못이라고 했다면, 오늘 밤도 같은 성경입니다. 성경은 여자가 머리카락을 자르면 남편이 그 여자와 이혼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여자가 자기 머리를 욕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니 회중석이나 강단, 둘 중 한 곳에 무언가 잘못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진실입니다. 보십시오. 예전에는 여성들이 치마를 낮게 내려 입고 앞을 이렇게 위로 올리는 것조차 잘못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오순절 여성들이 반바지를 입습니다. 사실입니다. 왜 그러십니까? 여러분은 “저는 반바지를 입지 않아요. 긴 바지를 입어요”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더 나쁩니다. 여자가 남자에게 속한 옷을 입으면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 일이라고 성경이 말하는 것을 아십니까?
왜 우리가 치유 집회와 큰 부흥을 누리지 못합니까? 그것을 위해 굳게 서십시오. 죄가 문 앞에 있습니다.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런데 저는 이런 교회에 속해 있고…”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말씀으로 마음을 두드리고 계신 것입니다. 사실입니다. 여성들이 입는 저 천하고 보기 흉한 옷들 가운데는… 여러분은 제게 “브래넘 형제님, 그런 옷밖에 팔지 않아요”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지금도 재봉틀과 옷감은 팝니다. [불명확한 말.] 여러분에게 맞는 것을 말입니다. 자매님들, 한 가지 여쭙겠습니다. 심판 날에 무슨 죄를 지은 책임을 지게 될지 아십니까? 죄인들과 간음한 책임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복되신 주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여자를 보고 그녀에게 음욕을 품는 자는 이미 마음속으로 그녀와 간음하였느니라.” 여러분이 그런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낸다면, 남편이나 남자 친구에게는 백합처럼 순결할지라도,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이 자신을 그렇게 드러내 보인 그 죄인과 간음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에게 죄가 있습니까? 여러분이 그런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낸 것입니다.
여러분은 “브래넘 형제님, 여성들만 나무라시는군요”라고 말합니다. 좋습니다. 남성 여러분, 아내가 담배를 피우고 그런 옷을 입도록 내버려 두는 남자는 어떤 사람인지 드러내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가정의 다스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된 것입니까? 미국의 가정들을 제대로 세울 수가 없습니다. 청소년 비행이 생기는 것도 당연합니다. 부모가 잘못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잘못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그렇습니다. 사실입니다. 마음을 상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부흥이 일어나려면 우리가 깨끗해져야 하며, 하나님께서 들어오시기 전에 그 안의 모든 벌레 같은 것들을 없애야 합니다. 문 앞에 서서 여러분은 “제 사생활에 간섭하고 계십니다”라고 말합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에게는 “교만”이라는 또 하나의 작은 문이 있습니다. 아, 이런! “그것은 건드리지 마십시오. 보세요, 브래넘 형제님. 저는 요즘 그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좋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사생활입니다. 여러분은 “제 사생활에 불쑥 끼어들 권리가 없으십니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께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말씀에 근거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 자체가 말해 줍니다. 그렇습니다.
사생활입니다. “나와 존스네만…” 아시겠지요. “나와 내 교단.” 여러분에게는 형제들 사이에 교단의 선을 그을 권리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교리 같은 것에 견해가 다를 수는 있고, 그것은 괜찮습니다. (저는 체리 파이를 먹고 다른 사람은 사과 파이를 먹습니다. 그래도 둘 다 파이를 먹고 있습니다.) 어떤 형제가 여러분과 똑같이 믿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선을 그을 권리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교단을 붙들고 다니며 “그러니 나는 이것을 지키겠어. 나는 저 광신자들이 싫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천국에 간다면 그들과 함께 가게 될 것입니다. 그곳에는 그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장로교인이라 그런 데는 가지…” 그렇다면 좋습니다. 바로 여러분의 모습입니다. 보십시오. 그분을 안에 들이기는 합니다. 지옥에서 구해 주시게 하기는 하지만, 여러분의 주님이 되시게 하지는 않습니다. 주님이라는 말은 “다스리는 권한”을 뜻합니다. 주님이라는 말은 “소유하는 권한”을 뜻합니다. 그분이 들어오시면 여러분의 주님이 되시게 하십시오.
이 위대한 복음 전도자 빌리 그레이엄이 루이빌에서 큰 집회를 열었을 때, 저는 그분의 조찬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저는 그분이 일어나 성경을 들고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것이 본보기입니다.” (그 말씀은 옳습니다. 정확합니다.) 그분은 말했습니다. “바울이 어떤 도시에 들어가 부흥 집회를 열고 약 1년 뒤 다시 찾아갔을 때, 그가 구원받게 한 한 사람이 다른 서른 명을 구원받게 했습니다.” 또 말했습니다. “제가 어떤 도시에 들어가 부흥 집회를 열면 2만 명이 구원받는데, 6주 뒤에 돌아가 보면 스무 명도 찾을 수 없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문제는 이것입니다. 사람들은 그저 전도 집회와 큰 군중에 열광할 뿐입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꼭 그렇습니다. 오순절교인들도 같아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주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불명확한 말.] 여기 그분의 백성에게… 그리고 “주님, 들어오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그곳에서 다시 믿음이라는 작은 문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문들을 모두 열 시간이 있으면 좋겠지만, 저는 이 작은 믿음의 문을 열어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자, 브래넘 형제님, 저에게는 믿음이 있습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제 마음에 들어오시게 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분께 큰 영광을 돌려 드렸다고 생각했습니다. 때로는 그렇게 행동합니다. 아, 예수님께서 문까지 오셔서 거기 서 계시게 했으니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하셨습니까. 그분은 그렇게 오래 서 계시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라도 오래 머물지 않겠습니다. 제가 “오셔서 여기 서 계세요. 움직이지 마세요. 여기 다른 것은 아무것도 건드리지 마세요”라고 한다면, 여러분도 제 집에 오래 머물지 않을 것입니다. 환영받지 못한다는 것을 아실 테니까요. 그래서 2만 명 가운데 스무 명만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분을 안으로 모셔야 합니다. 그분이 들어오시면 경배하며 말해야 합니다. “주님, 들어오십시오. 저의 구주가 되어 주십시오. 저의 하나님이 되어 주십시오. 저를 다스리는 분이 되어 주십시오. 저의 치유자가 되어 주십시오. 저의… 제가 살면서 알기 원하는 모든 것이 되어 주십시오. 저의 주님이 되어 주십시오. 주님, 제게 있는 모든 것을 취하시고 다스려 주십시오. 제 감정을 취하십시오. 저는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겠습니다. 제 교만을 취하십시오. 주님, 문 안에 서셔서 주님의 말씀으로 저를 씻어 주십시오.” 그러면 부흥이 시작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 제 사생활 가운데 서십시오.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저를 만들어 주십시오. 제 생각을 따르지 않고 주님의 생각을 따르게 해 주십시오. 오 주님, 저를 인도하십시오.” 그분은 결코 여러분을 말씀에서 벗어나게 하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을 자신의 말씀 안에 꼭 지켜 주실 것입니다. 침례교인들이 그렇게 해서도, 오순절교인들이나 장로교인들이 그렇게 해서도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여러분은 그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태어난 사람은 결코 자신에게서 떠나지 않는 어떤 것을 만납니다. 먼저 광야 저편의 거룩한 모래 위에 서 본 적이 없다면, 누구도 복음을 전할 자격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똑똑하고 영리해서 무엇이든 설명으로 없애 버릴 수 있는 신학자들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심지어 성경 전체까지도 없애 버립니다. 그들은 여러분의 생각과 다른 모든 것을 비틀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마음에 온전히 들어오시게 하고, 광야 저편에서 그 체험을 한 번이라도 했다면, 형제여, 지옥의 모든 마귀가 와도 그 땅에는 발을 들일 수 없습니다. [불명확한 말.] 그것은 실제적인 것입니다. 그 작은 믿음의 문 말입니다. 여러분은 “아, 설교자님, 여러분이 신유를 믿는다는 것은 압니다. 하지만 제 신앙에서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신앙이 잘못된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들어오시게 하면 여러분은 더 이상 “기적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에 계시며, 그분 자신이 기적이십니다. 그분은 기적을 행하시는 분입니다. 기적의 시대는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기적은 여러분의 마음속에 있으며, 그분께서 갈릴리를 걸으셨을 때와 똑같이 지금도 존재합니다. 그분께서 거기에 계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분을 안으로 모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그 문 안에 한 번 서 계시게 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믿음을 사용하십시오. 그것은 여러분의 것입니다. 여러분이 다시 태어나 그리스도를 문 안으로 모셨다면, 그분께서는 바로 그 문 안에 서서 말씀하실 것입니다. “나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니라.” 그렇습니다. 제가 말한 모든 말씀은 그분의 일부입니다. “나는 그저 여기 앉아 있느니라. 나는 너의 왕이니라. 나는 너의 치유자니라. 나는 너의 기쁨이니라. 나는 생명의 샘들이니라. 나는 알파와 오메가니라. 나는 네가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요, 네가 밤에 잠자리에 드는 것이니라.” 다윗이 말한 것처럼 말입니다. “참으로 내가 사망의 그늘진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악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시나이다. 내가 지옥에 내 침상을 펼지라도 그분께서 거기 계시리라.” 아, 우리에게는 옛날과 같은 부흥이 필요합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이제 한 가지만 더 보십시오. 그분께서는 여기서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라오디게아 교회 시대를 향해 “내가 네게 권고하노니 와서 내게서 정금을 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네가 부자라고 말하였다”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얼마나 부유합니까? 그 어느 때보다도 건물이 크고, 돈도 많습니다. “네가 ‘나는 부자라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라고 말하는도다. 그러나 네가 벌거벗었고 가련하며 눈멀고 가난하고 비참한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그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무엇이라고요? “…알지 못하는도다.” 만일 여러분이 비참하고 벌거벗고 눈먼 사람이 거리를 걸어오는 것을 보고 달려가서 “선생님, 지금 벌거벗고 계십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말입니다. “아, 제가 그렇습니까? 그러면 저를 도와주십시오.” “여기 도와드릴 것이 있습니다. 어서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옷을 입혀 드리겠습니다.” 그가 여러분의 말을 듣는다면 괜찮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그런 상태이면서도 그것을 모른다면 어쩌겠습니까? 성경은 이 마지막 교회 시대가 그러할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오순절교인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훌륭한 교회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래쪽 작은 선교회에서… 이 아래 거리에서 값이 10센트밖에 안 되는 작은 냄비를 들고 북이든 무엇이든 두드리며 죄인들에게 회개하라고 외치는 것이,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이 거대한 교회 안에서 영안실처럼 변해 가는 것보다 훨씬 나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것이 옳다는 것을 아십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상하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여러분의 형제입니다. 그저 진실을 말씀드릴 뿐입니다. 그러니 라오디게아 교회… 그래서 제가 여성 여러분이 온갖 치장을 하는 것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오순절 여성 여러분이 얼굴에 그 매니큐어를 바르는 것 말입니다. 아시지요. 아니, 그게 무엇이든 그 물건 말입니다. 여러분에게는 그런 것이 필요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마귀에게서 난 것입니다. 분명히 그렇습니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성경에서 얼굴에 칠을 한 여자는 단 한 명뿐이며, 그 이름은 이세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여자를 개들의 먹이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보십시오. 얼굴에 그렇게 칠을 하면 개 먹이가 되는 것입니다. 농담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 이곳은 농담하는 곳이 아닙니다. 저는 그저 진실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교도의 습성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말씀에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가련하고 비참하고 눈멀었는데도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저는 켄터키의 판자로 지붕을 이은 작고 낡은 집에서 자랐습니다. 어머니는 우리 어린 브래넘 집안 아이들을 모두 한 침실에 몰아넣으셨습니다. 발치에 세 명쯤, 머리맡에 세 명쯤, 그 가운데를 가로질러 또 세 명쯤 누웠습니다. 우리에게는 낡은 천막천 한 조각밖에 없었는데, 어머니는 눈과 비가 우리 눈에 들어오지 않도록 그것을 침대 위에 덮어 주셨습니다. 그러면 외풍이 들어와서… 밤에 그 찬 바람이 들어오면 때로는, 어머니는 그것을 “눈곱”이라고 하셨습니다만, 우리 눈에 찬 기운이 들어가 두 눈이 달라붙곤 했습니다. 제가 맏이였으므로 어머니는 “빌리, 어서 내려오너라” 하셨습니다. 저는 “엄마, 안 보여요. 눈이 붙어 버렸어요”라고 했습니다. 제 어린 동생 에드워드도 “엄마, 저도 안 보여요”라고 했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우리 눈에 감기가 든 것이었습니다. 염증이 생겨 눈꺼풀이 달라붙었던 것입니다. 제 할아버지는 너구리 사냥꾼이셨습니다. 너구리, 그러니까 라쿤을 잡아 가져다가 기름을 녹여 내시곤 했습니다. 어머니는 낡은 냄비에 담긴 그 너구리 기름을 가져다가 난로에 올려놓으셨습니다. 아주 뜨겁게 데워서 우리에게 올라와 눈을 문질러 주시면, 잠시 뒤 눈이 뜨였습니다. 어떻게 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 기름이 눈의 눈곱을 부드럽게 해서 우리가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형제여, 말씀드리겠습니다. 교회에 한파가 지나갔습니다. 오순절 교회가 어디선가 독한 감기에 걸렸습니다. 그들의 눈을 뜨게 하려면 너구리 기름보다 더한 것이 필요합니다. [불명확한 말.] “내가 네게 안약을 좀 주리니, 그 안약이 네 눈을 뜨게 하리라.” 말씀을 전하는 것으로 안 된다면 저는 다른 안약을 모릅니다. 성령께서 말씀을 뜨겁게 하시고, 오늘 밤 교회 전체에… 교회는 그 말씀을 사랑합니다. 물론입니다. 그 말씀이 눈을 뜨게 합니다. 그러면 어디선가 교회에 찬바람이 불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갈라져서 “나는 이것이다, 나는 저것이다”라고 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결국 우리가 무엇인지 의문이 듭니다. 아, 여러분, 여러분이 알기만 한다면 말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아들딸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든… 여러분의 눈에 눈곱이 끼었을 뿐입니다. 이번 부흥 집회에서 우리가 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안약을 발라 눈을 뜨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선하셨는지 보십시오. “내가 문 앞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들어가 그와 교제하리라. 침례교인이 내 말을 듣고, 감리교인이 내 말을 듣고, 오순절교인이나 나사렛교인이나 필그림 성결교인이 내 말을 들으면 내가 들어가리라. 네 눈에 기름을 조금 발라 눈을 뜨게 하여 네가 어디에 있는지 보게 하리라.” 아,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오순절 교회는 부흥을 경험했습니다. 조금 전 저를 부흥의 선두에 섰다고 소개해 주신 목사님, 여기 계신 자그마한 유대인 형제님이 말씀하실 때… 우리는 놀라운 부흥을 경험했습니다. 역사상 언제 이 오순절 시대와 같은 부흥이 있었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밤 하늘 아래 모든 나라에 부흥의 불이 타오르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마지막 때에 있습니다. 참으로 놀랍습니다. 이 큰 교회들, 이 훌륭한 사람들의 본부가 있는 이곳 댈러스의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이런 말씀을 드렸다고 해서 마음 상해하지 마십시오. 친구여, 저는 여러분의 유익과 복음의 유익을 위해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자, 보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참된 치유 집회를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작은 담들을 허물고, 자신을 바로 세우고, 얼굴을 씻고, 몸을 털고 일어나 십자가의 [불명확한 말.]로 나아가면 실제적인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기 시작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시온의 노래들이 우리가 갈망해 온 옛날과 같은 복을 되찾아 줄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오순절의 하늘에 그것이 가득합니다. 참된 것들이 가까이 있는데 왜 대용품을 받겠습니까?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아십니까?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보았기 때문에 우리가 가진 것의 가치를 잊어버렸습니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바다를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조금 쉬고 싶었습니다. 바다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사막 같은 지방에서 자란 그는 바다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나는 바다로 가는 길입니다… 짭짤한 바닷바람의 냄새를 맡고, 거대한 바닷물결이 공중으로 치솟았다가 부서지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푸른 하늘이 짠 바닷물을 비추어 푸르게 물들이는 모습도, 갈매기들이 바다 위를 빙빙 돌며 사납게 울어 대는 소리도 말입니다. 그것을 듣고 보고 싶습니다. 그런 것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니, 제게 참으로 좋은 휴식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바닷가에 갈 준비를 했습니다. 바닷가에 이르기 직전, 돌아오던 늙은 뱃사람 하나를 만났습니다. ‘올드 솔트’라는 말은 늙은 선원을 뜻합니다. 그 선원이 말했습니다. “여보시오, 어디로 가시오?” 그는 “선생님, 바닷가로 갑니다. 큰 파도를 보러 갑니다”라고 말하며, 그런 것들을 보기만 해도 얼마나 가슴이 설렐지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늙은 선원이 말했습니다. “나는 그 바다에서 태어났소. 배 안에서 태어났지요. 40년 동안 저 파도를 보고 갈매기들의 울음소리를 들었소. 나는 거기서 신나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못 느끼겠소.” 아시겠습니까? 그는 너무나 많이 보아서 그것이 평범해져 버린 것입니다. 신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 제게, 어제 이곳에서 자그마한 목사님이 어린 여자아이를 위해 기도했는데 그 아이의 다리가 2~3인치 자랐다고 말했습니다. 세상에, 그것이라면 이곳 전체가 불붙어야 마땅합니다. 물론 그래야 합니다. 왕께서 이곳에 계십니다.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위대하고 권능 있는 그리스도께서 이곳에 계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믿기만 하면 그분은 크고 능력 있는 일들을 행하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믿지 않으십니까? 물론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믿기만 한다면 말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이렇게 말하십시오. “하나님, 오늘 밤 저희 눈을 뜨게 해 주시고 주님의 영광을 보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하나님, 그러면 저희가 큰일들을 보겠습니다. 하지만 저희 눈이 뜨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렇게 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의 눈이 떠져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큰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외치며 “주님을 찬양합니다”라고 하는 것을 보면서도 우리는 그것을 눈여겨보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실입니다. 크고 능력 있게 역사하시는 것이 우리에게 평범해집니다. 너무나 평범해서 아무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 것입니다.
얼마 전 루이지애나에서… 아니, 조지아였던 것 같습니다. 제가 아는 한 흑인 노인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참 훌륭한 노인이었고 고귀한 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에게는 한 노인이 있었는데, 그 노인이 다니던… 그의 아내가 교회에 다녔으며, 그 부인은 경건하고 성도다운 노인이었습니다. 부인은 오랫동안 남편을 위해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남편의 이름은 가브리엘이었지만, 줄여서 “게이브”라고 불렀습니다. 사람들은 아무리 해도 게이브 노인을 바로잡을 수 없었습니다. 어찌 된 일인지 그가 교회와 하나님 앞에서 바른 관계를 맺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흑인 노인 목사님은 게이브 노인을 여러 번 사냥에 데리고 갔고, 두 사람은 나가서 사냥을 하곤 했습니다. 어느 날 사냥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아, 두 사람 모두 토끼와 새들을 몸에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는데, 너무 많이 짊어져 거의 걷지도 못할 정도였습니다. 그들은 늘 다니던 낡은 오솔길을 따라 오고 있었습니다. 그 길을 걸으면서 목사님은 해가 지고 있는 서쪽을 자꾸 돌아보았습니다. 형제여, 말씀드리겠습니다. 교회는 지금이 해 질 때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해가 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는 이 복들은 무엇입니까? 선지자는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저녁때에 그것이 빛이 되리라.” 어떤 빛입니까? 해는 어떻게 움직입니까? 동쪽에서 빠르게 떠올라 서쪽으로 집니다. 문명도 동쪽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 이동했습니다. 동양과 서양이 서로 만났습니다. 주님의 뜻이라면 이번 주에 그것에 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자, 보십시오. 같은 빛입니다. 해가 떠올라 동쪽을 비출 때의 바로 그 해가 서쪽에서도 비칩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성경은… 아니, 선지자는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날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어슴푸레한 때, 그저 어슴푸레한 때입니다. 우리에게는 교회에 가입하고 교단을 세우며 훌륭한 교회를 짓기에 충분한 빛은 있었습니다. 2천 년 동안 그런 빛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저녁때에 빛이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동양에 내렸던 바로 그 빛, 오순절에 내려 같은 결과를 가져왔던 바로 그 성령께서 오늘날 서양 사람들에게 내리고 계시며 그때와 똑같은 결과를 가져오고 계십니다. 빛이 있을 것입니다.
목사님이 서쪽을 바라보고 있을 때, 함께 걷던 그 흑인 노인이 목사님의 어깨에 손을 대었습니다. 목사님이 돌아보니 게이브 노인의 뺨에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목사님, 오늘은 토요일입니다. 내일 아침이면 제가 회개하는 자리에 나와 있는 것을 보실 겁니다. 저기 그 교회에서 사랑하는 아내 옆에 제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제 생명을 거두실 때까지 거기서 신실하게 지내겠습니다.” 목사님은 그 말을 듣고 너무나 기뻤습니다. “게이브, 내가 얼마나 고맙게 여기는지 알지요? 그런 말을 들으니 참 좋군요, 게이브. 그런데 왜 갑자기 마음이 달라졌소? 내가 전한 설교 때문이오? 내가 주님의 선하심을 말해 준 것 때문이오?” 그는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목사님. 저 아래 굽이를 돌아오는데 무엇인가 제 마음을 두드리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목사님도 아시다시피, 저는 헛간만 한 것도 못 맞힙니다. 이 고장에서 가장 형편없는 사수지요. 그런데도 보십시오. 제 몸에 매달린 이 토끼와 새들은 제가 직접 잡은 것입니다. 그분이 저를 사랑하시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것들을 제게 주시지 않았겠지요.” 그렇게 작고 단순한 일과, 마음을 두드리시는 그리스도의 소리입니다. “게이브, 오늘 내가 네 총의 가늠쇠 위에 있었단다.”
오늘 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좋은 차를 타고 오신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훌륭한 교회에 다니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저기 간이침대 위에 몸이 뒤틀린 채 누워 있는 어린아이와 달리, 여기 건강하게 앉아 있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기 건강하게 앉아 있는 젊은 아가씨, 저 안에 있는 작은 병든 아이, 경련성 마비가 있는 듯한 그 어린 여자아이와 견주어 보면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두드리시며 “너를 보니 반갑구나”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을 모르십니까? 어제 여러분이 일요일 식사를 먹을 수 있었던 것은 그분의 선하심 때문입니다.
몇 달 전 저는 인도 봄베이에서 거의 50만 명의 혼에게 말씀을 전하며 서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작은 아기들을 안은 어머니들을 보았습니다. 아이들은 배가 부풀어 오른 채 굶어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쓰레기통에 쓸어 넣는 음식 찌꺼기만 있어도 그들을 먹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두드리고 계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그런데도 여러분은 “글쎄요, 브래넘 형제님, 저는 교회에 다닙니다…”라고 말합니다. 편견을 품고 무관심하며 문을 닫아 놓습니다. 아, 오늘 밤 이곳에 모인 천 명쯤 되는 이 무리 전체가 (어쩌면 그렇게 많지는 않을지도 모릅니다만), 여러분이 오늘 밤 마음의 모든 문을 예수 그리스도께 열어 드린다면 앞으로 며칠 밤 사이에 신문 머리기사를 장식할 부흥이 터져 나올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입니다. 그분은 그것을 원하십니다. 오늘 밤 하나님께서 무엇보다 원하시는 것은 자신의 교회가 하나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훌륭한 목사들, 좋은 옷들, 좋은 차들, 좋은 직장들. 문 앞에 서 계신 놀라운 그리스도는 없습니다. 왜 그분을 안으로 모시지 않습니까? 그분께서 들어오시게 하십시오. 잠시 머리를 숙입시다.
괜찮으시다면 모두 눈을 감으십시오. 기도하기 전에 여쭙고 싶습니다. 이곳에 손을 들고 이렇게 말씀하실 분이 계십니까? “브래넘 형제님, 저는 형제님께 손을 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손을 듭니다. 지난 며칠 사이에 언젠가 제 문을 가만히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브래넘 형제님, 저는 마땅히 살아야 할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편견을 품었습니다. 저는 교인입니다. 더 잘했어야 했습니다. 그래야 했다는 것을 압니다. 이웃들에게 화를 냈습니다. 다른 교회들과 그들의 교리를 두고 논쟁했습니다. 그것을 팔아 버렸습니다… 저는 마땅히 살아야 할 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제가 한 그런 일들을 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 밤 문들을 열겠습니다. 이 시간부터 그분이 저의 주님이 되시게 하겠습니다. 브래넘 형제님, 저는 진심으로 이렇게 하겠습니다. 형제님께 손을 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손을 드는 것입니다. 주님, 제가 가겠습니다.” 제가 여러분을 위해 기도할 때 기억하게 해 주십시오. 이제 모두가 기도하는 동안 조용히, 예배당 곳곳에서 손을 들어 주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축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조용히 앉아 계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