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ING ROOM
잠시 머리를 숙이고 기도하겠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저희가 다시 주님 앞에 머리를 숙여 주님의 긍휼을 구할 수 있으니 이것이 저희의 특권입니다. 주님께서 저희를 물리치지 않으실 줄을 압니다.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러면 주어지리라.” 하신 말씀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희는 모든 것에 충분하신 그분의 이름으로 나아갈 때 주님께서 들으실 줄을 압니다. 오늘 밤 아주 특별한 방법으로 저희를 찾아와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에 주님의 임재를 부어 주셔서 죄인이 자기 죄를 깨닫고 부끄러워하며 회개하게 하시고, 길을 가는 나그네에게 용기를 주시며, 병들고 고통받는 이들을 고쳐 주옵소서. 주님의 이름에 영광을 받으옵소서. 주님의 아들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합니다. 아멘. 앉으셔도 좋습니다.
오늘 아침 목회자 조찬 모임에서 이 대집회를 대표하는 목사님들께 이런 질문을 드렸습니다. “제가 설교를 멈추고 앞으로 이틀 밤은 병자들을 위해 기도할까요?” 그러자 제가 병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만장일치로 결정하셨습니다. 저는 늘 그렇게 합니다. 본래 설교자가 아니었는데, 이제는 확실히 알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제게 어떤 사역을 맡기시든, 하나님의 지극히 높으신 권능의 거룩한 기름부음 아래서 섬길 수 있다는 것은 특권입니다. 저는 섬기는 데 쓸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그저 최선을 다해 섬깁니다. 그리고 언젠가 모든 일이 끝났을 때 그분께서 “잘하였도다.”라고 말씀해 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제게 주어진 것이 얼마 안 되지만, 그 주어진 것으로 최선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분께서 이해해 주시고 “잘하였도다.”라고 말씀해 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것이 제 소원입니다.
오늘 밤은 우리가 조금 늦었으므로... 조셉 형제님 말씀이 예배가 조금 길어졌다고 합니다. 저는 조금 전에 계단에 서서 기도하다가 친한 친구 몇 분을 만났습니다. 채터누가 근처에서 이 집회에 오신 홀 형제님과 다른 여러 목사님을 만나 악수하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여러분이 정겨운 옛 복음 찬송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런 정겨운 옛 찬송을 들으면 마음에 무언가가 일어납니다. 오늘 밤 저는 그저... 병자들을 위해 기도하기에 앞서, 먼저 여러분의 생각을 전도 집회에서 또 다른 형태의 전도, 곧 병자를 고치는 사역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배경 설명을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이 점을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신유는 여러 번 아주 심한 비난을 받아 왔습니다. 그 이유는 신유를 너무나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다루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유는 복음의 일부입니다. 속죄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옛 속죄에 신유가 포함되어 있었다면 더 나은 속죄에는 분명히 신유가 포함되어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그는 우리 범법들로 인해 부상을 당하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저는 이 신유라는 것이 한 사람에게 다른 사람을 고칠 능력이 있다는 뜻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주의 깊게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더운 줄 압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잠시만 참아 봅시다. 이 주제에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모른다면 차라리 그대로 두는 편이 낫습니다. 무슨 일이든 어설프게 하려 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전체 일의 일부밖에 못 하더라도, 하는 것만큼은 올바르게, 철저하고 완전하게 하십시오. 무엇을 위해 그리스도께 나아가는지, 어떻게 그분께 나아가야 하는지 모르면 얻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유는 사람이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신유는 그리스도께서 갈보리에서 완성하신 일, 이미 이루어진 그 일을 믿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도 고칠 능력이 없습니다. 예수님조차도 고칠 능력이 없으셨습니다. 우리 모두 그것을 압니다. 그분께서 “그 일들을 하는 이는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거하시는 아버지, 그분께서 그 일들을 하시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에게도 마음대로, 혹은 자기 스스로 고칠 능력이 없으셨다면... 그분은 “아들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께서 병자를 고친 공로를 자신에게 돌리지 않으셨다면, 오늘날이든 어느 시대든 사람이 병자를 고친다고 하며 사람들에게 영예를 받는 일을 얼마나 더 삼가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일입니다. 제가 여러분을 고칠 수 있다면 여러분을 구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복되신 주님께서 갈보리에서 완성하신 일이 동일한 속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갈보리에서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일을 여러분 자신이 믿는 그 믿음이 구원과 치유를 모두 가져옵니다.
제가 여기서 “고침을 받은 지 5년 된 분이 얼마나 됩니까?”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 손이 올라갈 것입니다. “고침을 받은 지... 아니, 구원받은 지 25년 된 분은 얼마나 됩니까?” 많은 손이 올라갈 것입니다. “구원받은 지 1년 된 분은 얼마나 됩니까?” 손들이 올라갈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그것이 맞지만 다른 면에서는 틀립니다. 여러분은 25년 전이나 1년 전에 고침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1,900년 전에 고침을 받고 구원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보리에서 죽으셨을 때 죄의 문제와 질병의 문제를 끝내셨습니다. 그곳에서 그분께서 우리 범법들로 인해 부상을 당하셨고, 그분께서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으며, 그때 모든 일이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다음, 완성된 그 일을 여러분 자신이 믿는 믿음을 통해 그분께서 갈보리에서 여러분을 위해 하신 일의 혜택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2,000년 전에 구원을 받았지만 그 구원을 받아들인 것은 25년 전이나 한 시간 전이나 5분 전입니다. 여러분은 2,000년 전에 고침을 받았고, 지금 당장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 사역은 미국에서 그리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이 병자에게 손을 얹는 옛 유대인 전통을 배워 왔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방인들에게 주어진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미국 사람들은 병자에게 손을 얹으라고 배웁니다.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 유대인이었던 야이로는 예수님께 “오셔서 제 딸에게 주님의 손을 얹어 주십시오. 그러면 딸이 살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의 아들이 아팠을 때 그는 “주님께서 제 지붕 아래로 오심을 제가 감당할 자격이 없습니다. 말씀만 하시면 제 종이,” 아니, 종입니다, “살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을 돌아보시며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내가 발견하지 못했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이방인의 방식은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저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에 기록하지 않으신 일도 하실 수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분께서 약속하신 것만 해도 제가 다루기에 충분합니다. 저는 그보다 적게도, 더 많이도 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모든 약속을 원합니다. 제가 그 약속들을 받도록 그분께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치유도 그분의 약속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기 계신 여러 학자분들이 아시듯이, 구약 시대에는 선지자가 진실을 말하는지, 또는 꿈꾸는 자의 꿈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알아내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그를 성전으로 데려가 우림과 둠밈 앞에 세웠습니다. 그것은 열두 보석이 박힌, 아론이 입었던 흉패였습니다. 선지자가 예언할 때 아무리 그럴듯해 보이더라도, 그 초자연적인 빛이 반짝이지 않으면, 곧 모든 보석이 함께 어우러져 빛을 반짝이지 않으면 그 선지자는 틀린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좋아 보여도 틀렸고, 꿈꾸는 자도 틀린 것이었습니다. 제사장에게는 옳지 않아 보여도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으로 그 빛들을 반짝이게 하여 입증하시면,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여기 계신 학자분들은 다 아시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구약 시대에는... 그 제사장 직분은 끝났습니다. 그 우림과 둠밈도 그 제사장 직분과 함께 끝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이 제사장 직분을 위한 또 다른 우림과 둠밈이 있습니다. 바로 그분의 성경입니다. 설교자가 설교를 하든, 선지자가 예언을 하든, 꿈꾸는 자가 꿈을 해석하든,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은 무엇이든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에 있으면 옳습니다. “누구든지 이 책에서 무엇을 빼거나 이 책에 무엇을 더하면...” 그러므로 저는 성경이 가르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가르치는 모든 것을 원합니다.
신유도 그렇습니다. 어떤 감정이나 몸을 떠는 것, 혹은 그런 종류의 일에 근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약속하셨고 여러분이 받도록 예수님께서 죽으신 그것을 받아들이는 데 근거합니다. 신유를 전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복음을 올바르고 분명하게 전할 수 없습니다. 그럴 수가 없습니다. 질병은 죄에 딸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를 다루지 않고서는 질병을 다룰 수 없습니다. 질병이 죄에 딸려 왔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질병이 있기 전에는 죄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생기자 질병이 뒤따라왔습니다. 둘을 함께 다루어야 합니다. 이렇게 말씀드리겠습니다. 큰 짐승이 제 옆구리에 발을 박고 제 갈비뼈를 뜯어내고 있다고 합시다. 그 짐승의 다른 부분은 저를 괴롭히지 않습니다. 그저 발이 제 갈비뼈를 뜯어내는 것입니다. 그때 저는 그 발을 잘라내려고 칼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 짐승의 머리를 때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짐승 전체가 죽습니다. 죄도 그렇습니다. 죄를 죽이면 그 뒤를 따르는 모든 것도 죽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자신이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부모와 그 부모의 연약함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죄는 유전됩니다... 아니, 질병이 유전되는 경우가 많다는 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듯이 세대가 지날수록 더 약해지고 더 지혜로워집니다. 그러므로 질병과 죄는 동일한 속죄의 근거 위에서 다루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제 집회를 비판해 왔습니다. 제가 그리 많은 사람을 위해 기도하지도 않고, 그들에게 손을 얹거나 손에 잡히는 어떤 일을 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누군가에게 손을 얹을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저에게 손을 얹을 필요도 없습니다. 필요한 것은 여러분이 그분께 손을 대는 것입니다. 바로 그분이십니다. 저는 여러분의 형제이고 그분은 여러분의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께 손을 대십시오. 이렇게 하십시오. 그분의 말씀을 붙들고 “주님, 저는 그것을 믿습니다.”라고 말하십시오. 많은 경우 신유는 어느덧 머리로 이해하는 개념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신유를 머리로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여러분이 결코, 결코 고침을 받을 수 없습니다. 크리스천 사이언스처럼 감정이 고조될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어떤 생각이 아니라 한 인격입니다. 신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갈보리에서 죽으셨고 그분께서 채찍에 맞음으로 여러분이 고침을 받았다는 계시를 통해 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그것을 계시해 주십니다. 머리가 아니라 마음에 말입니다. 그러면 어떤 것도 여러분을 거기서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머리로 이해한 것임을 보여 주듯이, 사람들은 한 기도 줄을 지나간 다음, 다른 전도자가 마을에 오면 또 그 기도 줄을 지나갑니다. 마치 토템 기둥들을 만지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으로는 낫지 않습니다. 가만히 서서 위를 바라보고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그것은 저를 위한 것이었습니다.”라고 말하십시오. 그렇게 받는 것입니다.
제 사역은... 아마 여기에는 우리의 치유 집회에 한 번도 와 보지 않은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제 사역은 사람들에게 손을 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디에나 계시며 지금 여기 계신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그 약속을 주신 바로 그분께서 지금 여기 계십니다. 1,900년이 지난 뒤에도 살아 계신 그분께서 지금 여기 계신다면, 그분께서는 분명 자신의 말씀을 어떻게 지킬지 아십니다. 여러분이 믿으면 그분께서 자신의 말씀을 지키실 것입니다. 이제 잠시 정해진 순서에 따라 이 주제를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가르치는 것이 무슨 꾸며 낸 신화나 수수께끼 같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경에 약속하신 것임을 보여 드리려는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을 조금 읽겠습니다. 여러분에게 드리는 말씀의 시작으로 요한복음 12장 20절과 히브리서 13장 8절을 읽고 싶습니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명절에 경배하러 올라온 자들 가운데 어떤 그리스 사람들이 있었는데 바로 그 사람들이 갈릴리 벳새다 출신의 빌립에게 가서 그에게 요청하여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님을 뵙기 원하나이다, 하매 그리고 히브리서 13장 8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이제 이런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되도록 짧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내 말이 어젯밤에는 소리가 너무 울려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저 뒤에서도 잘 들리는지 모르겠습니다. 들리면 손을 들어 보십시오. 위층에서도 들리면 손을 들어 보십시오. 좋습니다. 잘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셔서 우리가 이 문제를 분별 있게, 경건하게, 성경에 따라 다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성경기록은 깨뜨릴 수 없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그것이 진리라고 믿습니까? 진리라면 그분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셔야 합니다.
이 그리스 사람들은 명절에 올라와서 설교자인 빌립에게 이렇게 청했습니다.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님을 뵙기 원하나이다.” “그분의 일을 보고 싶다.”도 아니고 “그분께서 병을 고치시는 권능을 보고 싶다.”도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예수님을 뵙고 싶습니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밤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잘 표현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뵙기 원하나이다.” 성경에 그 그리스 사람들이 원하는 바를 얻었다고, 곧 그분께로 안내받아 그분을 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면 말입니다. 그분께서 동일하시고 우리의 소원도 그들의 소원과 같다면, 왜 우리는 예수님을 볼 수 없겠습니까? 이것이 광신적인 말처럼 들리겠지만, 저는 그저 말씀에 있는 것을 인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지키지 않으신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성경을 가볍게 여기며 “성경은 역사책이고 기적의 시대는 지나갔다.”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림 속의 불로 사람의 몸을 녹여 주려 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사람이 얼어 죽어 가는데 불을 그린 그림을 주며 몸을 녹이라고 하면, 그림 속의 불로는 몸을 녹일 수 없습니다. 몸을 녹이려면 실제 불이 있어야 합니다. 역사 속의 하나님이 오늘날에도 동일한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모세의 하나님이 오늘날에도 동일하시지 않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갈릴리를 거니시며 병자를 고치시고 큰 기적들을 행하신 하나님이 오늘날에도 동일한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오순절의 하나님이 오늘날에도 동일한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카나리아에게 비타민 A와 B를 먹여 튼튼한 날개를 만들어 주면서 한 번도 날게 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아시겠습니까? 그분께서 참으로 하나님이시라면 현재에도 하나님이셔야 합니다. 그분의 약속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우리가 예수님을 볼 수 있을까요?”라고 했습니다. 우리 동네에 살던 한 소년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그 아이는 여느 평범한 아이들이 마땅히 그러하듯 주일학교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설교자가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지 설교하는 것을 듣고 그 어린 마음이 감격했습니다. 어느 날 엄마에게 가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있어요?”라고 물었습니다. 엄마는 “주일학교 선생님께 여쭤보렴.”이라고 했습니다. 주일학교 선생님은 “선생님도 모르겠구나. 목사님께 여쭤보렴.”이라고 했습니다. 목사님은 “얘야, 물론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단다. 하나님을 보고 살 사람은 아무도 없거든.”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대답이 아이에게 꼭 만족스럽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오하이오강 근처에 삽니다. 그 아이는 제 교회에 다니던 늙은 어부와 함께, 루이빌에서 6마일 떨어진 식스마일섬이라고 부르는 곳으로 가곤 했습니다. 그 어부는 흰 수염이 있었습니다. 아이는 그 늙은 어부와 함께 그곳에 낚시를 하러 갔습니다. 어느 날 그곳에 있는 동안 폭풍이 몰아쳤습니다. 폭풍이 지나간 뒤... 그들은 폭풍을 피하려고 덤불이 있는 강가로 배를 댔다가 다시 강으로 나왔습니다. 늙은 어부의 그물에 물고기가 제법 많이 잡혀 그것을 싣고 내려가는데, 그들이 서쪽으로 가는 동안 동쪽을 향해 무지개가 나타났습니다.
늙은 어부가 노를 젓는데, 배의 고물에 앉아 있던 아이는 그분의 희끗한 수염 위로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이는 마음이 움직여 배 가운데로 달려가 늙은 어부의 무릎 곁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할아버지, 목사님도 주일학교 선생님도 우리 엄마도, 아무도 대답을 못 해 주시는 것 같아서 하나 여쭤보고 싶어요. 저 무지개를 만드신 하나님,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하나님을 사람이 볼 수 있을까요?” 늙은 어부는 아이의 말에 감정이 북받쳐 아이를 품에 안아 올렸습니다. 눈물로 아이의 작은 머리를 적시며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네 어린 마음을 축복하시기를 빈다, 얘야. 지난 40년 동안 내가 본 것은 모두 하나님이셨단다.” 왜 그럴까요? 밖에서 하나님을 보려면 먼저 안에 하나님이 계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안으로 들어오셔서 여러분의 눈으로 보시고 여러분의 눈과 생각, 사고와 시각과 감정을 사용하셔야 합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온전히 다스리셔야 합니다. 제가 여기 온 첫날 밤에 말씀드렸듯이, 문 안에 있는 문입니다. 그분께서 주인이 되셔야 합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안에 계시면, 무지개나 그 밖의 모든 것 가운데 어떤 모습으로 자신을 나타내셔서 여러분이 그분을 볼 수 있게 하십니다.
몇 주 전 켄터키주 루이빌에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감정이 폭발한 한 장면 때문에 잡화점 전체가 술렁였습니다. 한 여자가 잡화점에 들어왔는데, 아마 두 살쯤 된, 혹은 그보다 조금 더 큰 어린 아들을 안고 있었습니다. 여자는 매대마다 돌아다니며 작은 물건들을 집어 들고 “얘야, 이것 봐. 여기 좀 봐, 얘야.”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그저 안겨서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여자는 다른 매대로 가서 물건 하나를 집어 들고 “얘야, 이것 좀 봐.”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잡화점 사람들이 그 여자를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여자는 점점 더 흥분했습니다. 마침내 소리가 나는 작은 장난감 앞에 이르러 그것을 집어 들었습니다. 그 나이의 아이들이라면 관심을 보일 만한 것이었습니다. 여자는 아이의 얼굴 앞에서 그것을 흔들며 “얘야, 이것 좀 봐.”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그저 안겨서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여자는 기진맥진하여 매대 위에 쌓인 작은 물건들 위로 쓰러졌습니다. 곁에 있던 사람들이 도우려고 달려와 “부인, 무슨 일이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여자가 말했습니다. “아, 아니에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어요.” 그들이 “나아지지 않았다니, 무슨 말씀이세요?”라고 물었습니다. 여자는 “조금 전에 의사 선생님은 아이가 나아진 것 같다고 하셨어요.”라고 했습니다. “이 아이가 제 아들이에요. 그런데 아이가 그저... 의사들이 아는 한 정상인 아이예요. 하지만 이제는 제 나이 또래 아이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것들에 아무 관심도 보이지 않아요. 정신이 마비된 것처럼 멍하니 바라보기만 해요.” 그리고 “나아지지 않았어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어요.”라고 했습니다.
저는 오늘 밤 교회의 상태가 바로 그렇지 않은지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주 예수님을 안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분께서는 여러분 앞에서 온갖 은사를 흔들어 보여 주셨습니다. 이 미국은 그리스도교 국가라고 합니다. 빌리 그래함, 오럴 로버츠, A. A. 앨런, 그리고 큰 은사를 받은 여러 훌륭한 사역자들이 이 나라를 두루 다녔습니다. 그들이 사람들 눈앞에서 그 은사를 흔들어 보여 주었는데도 사람들은 마비된 것처럼, 영적으로 마비된 것처럼 앉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룩한 임재를 보여 주시는데도 여전히 “글쎄요, 앨런 형제님이나 로버츠 형제님이나 브래넘 형제님이 올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자녀들을 보시며 하나님께서는 무슨 생각을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 사람들이 올 때까지 기다리지 마십시오. 그들은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여기 계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 여러분 앞에 자신을 나타내고 계십니다. 그런데 교회는 그저 멍하니 바라보며 “물론 믿지요. 아, 그럼요. 믿습니다.”라고 하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너무나 흔한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길게 말씀드릴 시간이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그분께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고 말씀한다면, 그분께서는 동일하셔야 합니다.
제가 어젯밤에도 말씀드린 것 같은데, 하나님께서 한번 결정하시면 그것은 영원한 결정입니다. 그분은 변하실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방식은... 죄인이 하나님께 나아와 자기 죄를 회개하여 하나님께서 그 죄인을 용서하셨다면, 두 번째 죄인이 왔을 때도 하나님께서는 똑같이 하셔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첫 번째 죄인을 구원하셨을 때 잘못하신 것이 됩니다. 그러니 그리스도께서 유대인의 경륜이 끝날 때 자신을 나타내셨다면... (이제 잘 들으십시오.) 그분께서 유대인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셨던 그 방식 말입니다. 그들은 그분이 오시기를 기다리고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렇지요? 이방인들은 그분이 오시기를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그때 우리는 우상을 숭배하는 이교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의 경륜이 끝날 때, 그들이 그분을 거절했을 때, 곧 유대인의 경륜이 끝날 때 그분께서 자신을 나타내셨던 방식 그대로 이방인의 경륜이 끝날 때도 똑같이 하셔야 합니다. 유대인의 시대가 끝날 때에는 자신의 권능으로 그렇게 자신을 나타내시고 이방인들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면, 그때 잘못하신 것이 됩니다. 분명히 이해하시겠습니까?
선지자는 “밤도 아니고 낮도 아닌 한 날이 있을 것이나, 저녁때에는 빛이 있으리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무엇을 보아 왔습니까? 지리적으로 해는 동쪽에서 뜹니다. 문명도 동쪽에서 일어나 서쪽으로 이동해 왔습니다. 이제 서해안까지 왔습니다. 동양과 서양이 만났습니다. 저는 전도 집회 때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것에 대해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자, 주목하십시오. 동쪽에서 뜨는 바로 그 해가 서쪽에서 지는 해입니다. 우리는 2,000년 동안 성경을 가르치고 교회들을 세워 왔습니다. 그것은 다 좋은 일입니다. 빛이 조금 있었습니다. 완전히 환한 낮은 아니었습니다. 안개 낀 날처럼 어둑한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자신의 구주로 받아들이고, 교회를 세우고, 조직을 만들 만큼의 빛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처음에 빛이 비치던 모습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제 저녁때입니다. 해가 지면서 서방 사람들에게 빛이 비치고 있습니다. 동방 사람들은 유대인들이었고, 서방 사람들은 이방인들입니다. 다른 아들이 아니라 동일한 아들,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신 동일한 하나님의 아들께서 오늘날 이방인들을 대하고 계십니다. 유대인들을 대하셨던 바로 그 방식으로, 성령의 침례를 통해 자신의 교회 가운데 자신을 나타내고 계십니다. 다른 분이 아니라 동일한 분입니다.
그분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라.”라고 하셨습니다. 포도나무 줄기가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닙니다. 줄기는 가지에 힘을 공급할 뿐이며, 가지가 열매를 맺습니다. 그것을 아십니까? 호박 넝쿨에 가면, 그 넝쿨이 열매를 맺는 것이라면 호박을 얻습니다. 수박 넝쿨에 가면 수박을 얻습니다. 포도나무에 가면 포도를 얻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교회에 오면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그분의 포도나무에서 무엇을 봅니까? 교단, 다툼, 싸움, 논쟁, 그리스도의 열매를 제외한 온갖 것을 봅니다. 예수님은 “내가 하는 그 일들을 너희도 하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코스모스, 곧 ‘세상의 질서’입니다, “세상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너희는 나를 보리니, 내가,” 그리고 ‘내가’는 인칭 대명사입니다, “내가 세상의 끝까지 너희와 함께, 너희 안에 있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그분께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고 말씀합니다.
사람의 계통은 세 가지뿐입니다. 우리 모두 압니다. 유대인과 이방인과 사마리아인입니다. 사마리아인은 반은 유대인이고 반은 이방인입니다. 이들은 함과 셈과 야벳의 후손들입니다. 그 세 사람은 노아의 세 아들로, 홍수로 멸망한 뒤 인류가 그들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주목하십시오. 유대인들과, 반은 유대인이고 반은 이방인이었던 사마리아인들은 메시아의 오심을 기다렸지만 이방인들은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이방인들은 로마의 이교도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메시아의 오심을 기다렸습니다. 메시아께서 그들의 시대에 오셔서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나타내셨다면, 이방인들에게도 똑같이 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때 그런 방식으로 자신을 나타내신 것이 잘못된 일이 됩니다. 그분께서 자신을 동일하게 나타내지 않은 채 우리를 영원 속으로 들어가게 두신다면, 그것은 그분께서... 그저 우리가 “우리는 교회니까. 우리는 이런 교회니까. 우리는 가장 은혜로운 교회이고, 가장 능력 있는 교회이며, 성경을 가장 잘 따르는 교회니까.”라고 하며 그런 것들에 기대어, 그분께서 자신을 나타내시지도 않은 채 영원 속으로 들어가게 두신다면...
그들에게도 똑같이 바리새인, 사두개인, 헤롯당 같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오셔서 어느 쪽 편도 들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내가 만일 내 아버지의 일들을 행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라. 그러나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행하거든 그 일들은 믿으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떠나실 때 하신 말씀을 보십시오.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그렇게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그분을 보내신 아버지는 그분과 함께 가셨고 그분 안에 계셨습니다. 사람을 보내시는 그리스도도 그 사람과 함께 가시며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자신의 교회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가지들에 힘을 공급하시므로, 그분께서 이 땅에 계실 때 맺으셨던 것과 똑같은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들에 그분께서 교회에 오셨을 때, 아들의 빛이 충만한 가운데 오셨습니다.
이것을 공정하게 설명할 수 있는 길은 하나뿐입니다. 제가 “감리교인 여러분은 그분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묻는다면, “물론 그분께서는 어제나 동일하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것은 믿지 않고 저런 것도 믿지 않습니다.”라고 할 것입니다. 장로교인들에게 “여러분은 어떻습니까?”라고 물어도 똑같습니다. 침례교인들에게 “여러분은 어떻습니까?”라고 물어도 똑같습니다. 오순절교인들에게 “여러분은 어떻습니까?”라고 물어도 똑같습니다. 장로교인은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킨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으로 끝입니다.”라고 합니다. 좋습니다. “그러면 성령의 침례는 어떻습니까?” “아, 우리는 그것은 믿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른 시대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침례교인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침례를, 곧 물에 잠기는 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러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고 물에 잠기는 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성령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믿는 바로 그때 성령을 받습니다.” 바울은 여러분과 생각이 다릅니다. 그는 “너희가 믿은 이래로 성령님을 받은 적이 있느냐?”라고 했습니다. 저도 침례교인입니다. 하지만 저는 오순절 침례교인입니다. 그렇다면 오순절교인 여러분은 뭐라고 하십니까? “아,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브래넘 형제님. 우리는 방언을 말했을 때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입니다. 사실을 똑바로 보십시오. 그것이 그분께서 그때 교회에 자신을 나타내셨던 방식은 아닙니다. 물론 그분께서는 방언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저는 방언을 말하는 것과 방언 통역을 믿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시간이 있다면 아들을 지위에 세우는 것에 대해 설교하여, 그것이 옳은지 아닌지 성경으로 알아보고 싶습니다.
그러면 지난날 그분께서 무엇을 하셨는지 보십시오. 알아보는 길은 하나뿐입니다. 침례교인의 말이나 오순절교인의 말이나 감리교인의 말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결론이 나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요한복음 12장을 읽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으로 돌아가 그분께서 무엇을 하셨는지 알아봅시다. 어제의 그분이 어떤 분이셨는지 알아낸다면, 그분께서는 오늘도 동일하셔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그분께서는 유대인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그 점을 마음에 두십시오. 유대인들에게였지 이방인에게가 아니었습니다. 그분께서는 이방인들에게 가지 않으셨고, 제자들에게도 이방인들에게 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것을 기억하십니까? 왜 그랬습니까? 지금은 우리의 시대이고, 그때는 그들의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이방인들은 그분을 기다리지 않았고 유대인들은 기다렸습니다. 지금 우리는 유대인들을 두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자, 요한복음 1장에 그분께서 계십니다. 그분께서 기름부음을 받으시고 이 땅의 사역을 시작하셨을 때, 병자들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안드레라는 사람을 만나셨습니다. 안드레는 곧 가서 자기 형제를 데려옵니다. 그가 베드로인데, 당시에는 시몬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가 시몬을 데려왔을 때... 기억하십시오. 이 시몬은 어부였습니다. 성경은 그가 무식하고 배우지 못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형제님, 바로 그것으로 여러분의 온갖 신학교와 학교들이 무색해집니다. 이 사람에게 하나님의 왕국의 열쇠들이 주어졌습니다. 무식하고 배우지 못한 어부에게 말입니다.
저는 무지를 옹호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여러분이 교육과 신학에는 너무 큰 비중을 두면서, 하나님과 그분의 어디에나 계심과 권능에는 충분한 비중을 두지 않는다는 말씀을 드리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사람이 무식하고 배우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역사를 기록한 사람들은 그가 자기 이름을 눈앞에 써 주어도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을 택하여 쓸모 있는 사람으로 만드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하늘의 왕국의 열쇠들을 주셨습니다. 안드레가 찾았을 때... 가서 자기 형제를 데려오며 “와서 보시오.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소.”라고 했습니다. 자, 보십시오. 여기 오는 사람은 가야바나 어떤 제사장들 같은 대단한 신학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결코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무식한 사람을 택하셨고, 그 사람이 예수님 앞으로 걸어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람, 유대인인 이 무식한 어부를 만나셨을 때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보십시오. 그분은 “네 이름은 베드로,” 아니, “게바이고, 네 아버지의 이름은 요나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평생 자기를 본 적도 없는 사람이 그런 말씀을 하는데, 그 무식한 사람이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저는 요한복음 1장에서 읽고 있습니다. 이 무식한 어부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왔을 때 예수님은 그의 이름이 무엇이며 아버지의 이름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합니까? 성경을 읽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압니다. 그가 뭐라고 했을 것 같습니까? 그것이 어제의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유대인에게 자신을 알리셨습니다. 나중에 베드로는 왕국의 열쇠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날 빌립이라는 사람이 회심했습니다. 그는 너무나 감격해서 산을 돌아, 산 뒤로 15마일이나 갔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그 정도 거리가 맞는 것 같습니다. 그가 어느 집에 도착했습니다...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이야기로 그려 봅시다.
그는 친구의 집에 도착합니다. 좋은 징조입니다. 회심하자 친구에게 그 소식을 알리고 싶어진 것입니다. 남자든 여자든 소년이든 소녀든 참으로 회심하면, 삶에서 첫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그가 생각할 수 있는 전부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날 교회의 상태가 의아합니다. 그런 일에 우리가 마비되어 있는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불이 붙어 감격에 차서 타올라야 합니다. 아침에 눈을 뜰 때부터 밤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리고 하루 내내, 제 마음속에, 제 생각 속에, 온종일 말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따금 전도자가 마을에 오면 신앙생활을 하며 교회에 간다는 것입니다. 또 일요일 아침에 괜찮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없으면 주일학교에 가고... 아시겠습니까? 더 이상 우리 마음속에 있지 않습니다. 불이 꺼졌습니다. 누구나 알듯이 로마의 옛 신전, 아베스타에서는 불이 꺼지면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하나님의 제단에서 불이 꺼지면 집으로 돌아갈 때라고 생각합니다. 교회 문을 닫고 돌아가 새로 시작할 때입니다.
보십시오. 이 사람은 너무나 감격해서 산을 돌아갔습니다. 그가 문을 두드리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브래넘 형제님이 강단을 두드린다.] 아내가 문으로 나오자 그가 “나다나엘이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아내는 “아, 빌립, 반가워요. 남편은 방금 정원으로 잠깐 산책하러 나갔어요.”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정원으로 나갔습니다. 덤불 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습니다. 살그머니 다가가 보니 친구 나다나엘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오, 여호와여, 오셔서 저희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저희에게 구원자를 보내 주옵소서.” 빌립이 그곳에 서 있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물론 그리스도인다운 예의를 지켜 기도를 방해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손톱을 깨물며 “아, 왜 어서 끝내지 않는 거야? 빨리 소식을 알려 주고 싶어 못 견디겠네.”라고 하는 모습 말입니다. 교회가 그래야 합니다. 교회가 그래야 합니다. 그저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뒤로 물러서며 “그건 설교자가 할 일이야.”라고 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할 일입니다. 모두가 할 일입니다.
그는 기다렸습니다. 잠시 후 나다나엘이 “아멘.”이라고 했습니다. 일어나 옷의 먼지를 털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돌아보며 “빌립, 반갑네.”라고 했습니다. 빌립은 “안녕, 나다나엘.”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와서 우리가 누구를 만났는지 보게.”라고 했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인사할 시간도 없이 “와서 내가 누구를 만났는지 보게.”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친목 모임이나 목회자 협회가 있어야 함께 모인다는 것입니다. 아, 전할 소식은 “와서 우리가 누구를 만났는지 보게.”라는 것입니다. 나다나엘이 다소 놀란 눈으로 그를 보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네. 와서 보게.”라고 했습니다. 당시의 장로교회나 어떤 교회에 다니는, 확고한 히브리인 나다나엘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잠깐만, 나다나엘. 자네가 바른 사람인 건 아는데, 정신이 나갔나 보군.” 누가 그리스도를 만나면 사람들은 그가 정신이 나갔다고 생각합니다. “자네가 정신이 나간 게 틀림없군. 대체 왜 그러나? 자네가 말하는 사람이 나사렛 출신의 그 갈릴리 사람이라는 건가? 메시아께서 오신다면 우리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오셔서 ‘가야바야,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나는 로고스다. 나는 그리스도다.’라고 하실 걸세. 그러면 대제사장은 다른 제사장들을 모두 불러 ‘우리가 기다리던 분이 이제 오셨다.’라고 말할 걸세. 그렇게 될 거란 말일세.”
장로교인 여러분이 그렇게 생각합니다. 가톨릭 신자 여러분이 그렇게 생각합니다. 오순절교인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가톨릭 신자 여러분은 그리스도께서 이 시대에 자신을 나타내러 오신다면 교황에게 오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장로교인들 가운데는 자기네 감독에게 오셔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오순절교인 여러분은 지방회 장로에게 오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사람에게 가십니다. 거기에 다른 누구도 관여할 수 없습니다. 그분께서는 그저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나? 자네 어디에 갔다가... 무슨 이상한 일에 휘말린 게 분명하군.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나?” 빌립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와서 보게.”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의 교회가 협력하지 않는다고 집에 앉아 비판하지 말고, 직접 와서 보십시오. 무엇이든 알아보려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와서 직접 알아보십시오.
돌아가는 길에... 시간이 있으면 이 대목을 조금 더 다루고 싶습니다. 두 사람이 산을 돌아 걸어가는 길에 나다나엘이 말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빌립, 잠깐만. 자네가 말하는 게...” 빌립이 말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나다나엘, 자네에게 할 말이 있네. 저기 강가에서 시몬이라는 그 노인에게 생선을 샀던 때를 기억하나?” “그래, 기억하지.” “아, 생선 값을 받았다는 영수증에 서명도 못 하던 그 노인 말일세.” “그래.” “그가 주님 앞에 나왔을 때 예수님께서 그의 이름이 시몬이라고 말씀하신 걸 아나? 그리고 그가 자네에게 소개해 주었던, 저 통나무 위에 앉아 있던 그의 아버지 말이야. 이름이 요나였던 그분도 기억하나?” “그래, 기억하네.” “그런데 이 시몬이 예수님 앞에 나오자 예수님께서 ‘너는 시몬이고 네 아버지 이름은 요나다.’라고 하셨네. 빌립, 아니, 나다나엘, 자네가 그분 앞에 나가면 그분께서 자네 이름도 나다나엘이라고 말씀하실지 몰라. 그래도 나는 놀라지 않을 걸세.” “아, 잠깐만, 나다나엘, 아니, 빌립. 나를 그런 광신주의에 끌어들이지 말게.” “나는 자네를 무슨 광신주의에 끌어들이는 게 아니네. 성경을 살펴보게. 메시아께서 그렇게 오시게 되어 있지 않은지, 내 말이 맞지 않은지 알아보게.”
얼마 후 그들이 가까이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 줄에 서서 병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이것이 어제의 예수님이셨습니다. 회중 가운데로든 기도 줄로든, 어디였든지... 그가 기도 줄에 들어오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저 회중 가운데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예수님께서는 그를 보시고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을 보라. 그의 속에는 간사함이 없도다!”라고 하셨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은 “그가 입은 옷을 보고 아셨겠지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닙니다. 동방 사람들은 모두 비슷하게 옷을 입었습니다. 그는 그리스 사람일 수도 있었고 아랍 사람일 수도 있었습니다. 모두 똑같이 터번을 쓰고 긴 옷을 입었습니다. 모두 피부가 거무스름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너는 이스라엘 사람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단지 이스라엘 사람이라고만 하신 것이 아니라 “네 속에는 간사함이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그 유대인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 유대인의 말을 들어 보십시오. 그가 말했습니다. “랍비여,” ‘선생님’이라는 뜻입니다, “랍비여, 저를 언제 보셨습니까? 제가 이스라엘 사람이며 정직한 사람인 줄 어떻게 아십니까?” 예수님께서는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나무 밑에 있을 때 내가 너를 보았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눈입니까! 사실입니까?
그것이 유대인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던 어제의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분께서 유대인들에게 그런 방식으로 자신을 나타내셨다면, 똑같이 하셔야 할 책임이 있으십니다.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 때 한 방식으로 결정하셨다면, 다음에도 똑같이 결정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무한하시며 변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셔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그런 일은 이방인에게 행해진 적이 없었습니다. 유대인에게였습니다. 이제 그 기적을 직접 겪은 이 사람은... 여러분은 “그게 기적이었습니까?”라고 물으실 수 있습니다. 휠체어에 앉은 사람을 고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기적입니다. 감정이 고조되면 사람이 휠체어에서 벌떡 일어설 수도 있지만, 이런 일은 영적인 권능 없이는 결코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는 “랍비여, 선생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그는 신학자였고 그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선생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선생님은 이스라엘의 왕이시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를 나무 밑에서 보았다고 말하였으므로 네가 나를 믿느냐? 그러면 네가 이것들보다 더 큰 일들을 볼 수 있으리라. 와서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물론, 그곳에는 정통이라는 사람들끼리 따로 서 있었습니다. 온갖 학위를 가진 대단한 침례교인, 장로교인, 루터교인, 오순절교인들이 서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든 자기 회중을 달래야 했습니다. 그들은 “이 사람은 바알세붑이다. 점쟁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무언가로 몰아붙여야 했습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으니 무슨 꼬리표라도 붙여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텔레파시를 쓴다. 점쟁이다. 마귀의 영으로 이런 일을 한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대적하여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내가 용서하리라. 그러나 성령이 와서 똑같은 일을 할 때 그것을 대적하는 한마디는 이 세상에서도 오는 세상에서도 결코 용서받지 못하리라.” 자,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성령이 오셔서 똑같은 일을 하실 것이며, 그것을 대적하는 한마디는... 하고 예언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심판을 앞두고 있는 것도 당연합니다. 성령이 오셔서 똑같은 일을 하실 때, 한마디라도 대적하면 이 세상에서도 오는 세상에서도 결코 용서받지 못할 것입니다.
이제 한 사람만 더 살펴보고 싶습니다. 다른 민족이 있었는데, 사마리아인들이었습니다. 누구나 알듯이 사마리아인들은 유대교를 붙들고 있었습니다. 알고 계셨습니까? 물론입니다. 요한복음, 지금 저는 요한복음 3장에 있습니다. 이제 요한복음 4장으로 가겠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그분께서는 사마리아를 거쳐 가셔야 했습니다. 길을 가시다가 지치셔서 담 곁에 앉으셨습니다. 이처럼 주위가 조금 트여 있는 곳이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사마리아에 가서 그 우물을 보신 분이 있다면 아실 것입니다. 사람들이 도시에서 물을 길으러 오는 공동 펌프, 아니, 우물입니다. 그분께서는 앉으셨습니다. 낮 열한 시쯤, 아니면 열두 시쯤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먹을 것을 구하러 도시로 보내셨습니다. 그분께서는 피곤하고 지치셨으므로 거기에 앉아 쉬고 계셨습니다... 주목하십시오. 그곳을 거쳐 가셔야 했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그분께서 이 우물에 앉아 계시는데 한 여자가 나왔습니다. 아름다운 여자였다고 해 봅시다. 이십 대의 젊고 아주 아름다우며 사랑스럽게 생긴 여자가 나왔습니다. 그 여자는 잘못된 길로 들어서서 간음하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매춘부였습니다. 그 여자가 물을 길으러 우물로 나왔습니다. 아마 밤새 깨어 있다가 오전 내내 잤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사실은 점잖은 여자들이 있는 곳에는 올 수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따돌림받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그런 사람들을 표시해 두었습니다. 오늘날도 그런 표시를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분명히 많은 사람이 따로 구별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여자가 물을 길으러 나왔을 때, 그 여자는... 동방에 가 보셨다면 아실 텐데, 그들은 제가 보기에는 물주전자처럼 생긴 것을 가지고 다닙니다. 목이 아주 크고 이런 식으로 양쪽에 손잡이가 달려 있습니다. 저는 여자가 우물에 내려가 작은 밧줄에 작은 갈고리를 걸고, 도르래 줄을 내려 5갤런쯤 되는 큰 물동이 하나를 끌어 올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 물동이 세 개를 꺼내 하나는 머리에 이고, 하나씩 양쪽 옆구리에 걸칩니다... 여자 여섯 명이 길을 가면서 이야기하고 웃으며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입니다. 여자들이 으레 하듯 그저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렇게 걸으며 이야기하는데도 물 한 방울 흘리지 않습니다. 그저 걸어가며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 여자가 와서 물을 길으려고 물통을 내리려는데, “여자여, 마실 물을 내게 가져오라.” 하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돌아보니 저쪽에 유대인 한 사람이 앉아 있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당시에는 서로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여자는 그분을 보고 유대인임을 알았습니다. 그분은 겨우 서른... 서른두 살쯤이셨지만 성경은 쉰 살로 보이셨다고 말합니다. 그 사실을 아는 분이 얼마나 됩니까? 요한복음 6장에 “네가 아직 쉰 살도 넘지 않았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다고 하느냐? 이제 네가 마귀 들린 줄을 우리가 알겠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분께서는 “아브라함이 있기 전에 내가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아마 그분의 사역이 젊음을 앗아 갔을 것입니다. 머리가 조금 희어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분께서는 펌프 맞은편, 아니, 넝쿨이 담 위로 자라 있는 그 담 맞은편에 앉아 계셨습니다. 여자가 말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유대인이고 저는 사마리아 여자입니다. 우리는 서로 상종하지 않습니다. 선생님께서 제게 무엇을 청하시는 것은 관습에 맞지 않습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네가 누구와 말하고 있는지 알았다면 내게 마실 것을 구하였을 것이요, 내가 네게 물을 주어 네가 여기로 물 길으러 오지 않게 하였으리라.” 그분께서는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그 여자의 영과 접촉하고 계셨습니다. 여자가 말했습니다. “당신들은 예루살렘에서 경배해야 한다고 하는데, 우리 조상은... 선생님은 우리 조상 야곱보다 더 크다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보십시오.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야곱을 자기 조상이라고 부릅니다.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파셨고, 이 우물물을 마셨으며, 그의 가족도 마셨고 가축들도 마셨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는 이 물보다 더 좋은 물이 있다는 말씀입니까?” 그분께서는 “내가 주는 물은 사람 속에서 솟아나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대화는 그분께서 여자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아내실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어제의 예수님께서 메시아의 오심을 기다리던 사마리아인들, 그 버림받은 사람들을 대하고 계십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여자가 다시 바라보자 그분께서 “가서 네 남편을 데리고 여기로 오라.”라고 하셨습니다. 여자는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분께서는 “옳다. 네게 남편이 다섯이 있고 지금 함께 사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가 옳게 말하였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여자가 뭐라고 했습니까? “이 사람은 바알세붑이다. 악한 영이 들렸다. 점쟁이다.”라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매춘부였지만 이 도시에 있는 설교자들 절반보다 하나님을 더 잘 알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맞습니다. 여자는 “선생님이여, 내가 보니 선생님은 대언자시니이다.”라고 했습니다.
그 단어를 거슬러 살펴보면, 그것은 그 선지자, 곧 메시아를 뜻합니다. 모세가 “주 너희 하나님께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일으키시리라.”라고 했습니다. 여자는 “선생님이여, 내가 보니 선생님은 대언자시니이다. 우리는...”이라고 했습니다. 들으십시오. “우리 사마리아인들은 메시아께서 오시면 이런 일들을 알려 주실 줄 압니다.” 여자는 그것이 메시아의 표적임을 알았습니다. 여자가 말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누구십니까? 그분의 선지자이심이 틀림없습니다. 메시아께서 오시면 이런 일들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실 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누구십니까?” 그분께서는 “네게 말하고 있는 내가 그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여자는 물 항아리를 놓아두고 도시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와서 내가 행한 일들을 내게 말해 준 사람을 보십시오. 이분이 메시아가 아니십니까?” 그것이 어제의 메시아, 메시아의 표적이고 그분께서 오늘도 동일하시다면, 이방인 교회에도 동일한 표적이어야 합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그저 신학을 배우고 교회에 가입하는 것만으로 넘어가게 하실 수 없습니다. 그분께서는 유대인의 시대와 사마리아인들, 곧 자신을 기다리던 사람들에게 하셨듯이 이방인의 시대가 끝날 때에도 자신을 나타내셔야 합니다. 우리는 이제 2,000년 동안 가르침을 받아 왔습니다. 우리의 시대가 끝나 가고 있습니다. 이방인의 시대가 끝나 가고 있다는 데 동의하시는 분이 얼마나 됩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면,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에게는 자신을 알리셨으나 이방인들에게는 단 한 번도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면... 성경을 살펴보십시오. 그 후 2,000년 동안 단 한 번도 그런 일이 없다가, 바로 지난 몇 년에야 일어났습니다. 왜입니까? 해가 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메시아께서 자신의 교회로 돌아오셔서 여러분에게 성령의 침례를 주시고 축복하시며, 여러분의 구속이 가까워지고 있으니 위를 바라보게 하려 하십니다. 그런데 교회는... 하나님께서는 교회 앞에 자신의 은사들을 내보이시는데, 교회는 그 어린아이처럼 마비된 채 그저 앉아 있습니다. 오, 하나님, 저희의 죄 많은 혼들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면... 그분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성경 구절 하나를 더 인용하고 싶습니다. 요한복음 5장 19절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5장 19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데스다 연못으로 가셨습니다. 그곳에는 몸이 불편한 사람들이 누워 있었습니다. 많은 무리, 수천 명이나 되었고 오늘 밤 여기 앉아 있는 사람들보다 더 많았습니다. 다리를 못 쓰는 사람, 눈먼 사람, 절뚝거리는 사람, 몸이 오그라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곧장 그 연못으로 가셔서 단 한 사람에게도 손을 대지 않으시고 둘러보시다가, 바닥에 깐 요 위에 누워 있는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남부에 사는 여러분은 그런 요가 무엇인지 아실 것입니다. 저도 그런 요에서 자랐습니다. 문 앞에 작은 요를 펴 놓고 말입니다.
이 사람이 요 위에 누워 있었습니다. 그는 마비되지도 않았고, 다리를 못 쓰지도 않았고, 절뚝거리지도 않았습니다. 병약함이 있었습니다. 전립선 질환이었을 수도 있고 결핵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병의 진행이 더뎠습니다. 38년 동안 그 병을 앓았습니다. 그 때문에 죽을 병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여보시오, 온전하게 되기를 원하시오?”라고 하셨습니다. 왜 저쪽 사람에게는 안 하셨습니까? 왜 여기 마비된 이 사람에게는 안 하셨습니까? 그 사람이 말했습니다. “저를 물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저는 잘 달리지 못합니다. 누군가 오면 저보다 먼저 달려 내려가 물에 들어갑니다.” 그분께서는 “네 자리를 들고 네 집으로 가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조금도 따지지 않고 자리를 집어 어깨에 메고 걸어갔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따져 물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따져 물을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도 따져 물을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요한복음 5장 19절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5장 19절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그것은 ‘틀림없이, 틀림없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은 아버지께서 어떤 일을 하시는 것을 보고 그 일을 할 뿐이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느니라.” 아버지께서 하신다고 듣는 일이 아니고, 아버지의 뜻이라고 계시되는 것도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어떤 일을 하시는 것을 보고”입니다. 성경기록은 깨뜨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거기서 진실을 말씀하셨거나, 아니면 거짓말을 하신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아버지께서 먼저 환상으로 무엇을 할지 보여 주시기 전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께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면, 그때 하셨던 것처럼 똑같이 하셔야 합니다. 믿으십니까?
빌리가 기도 카드를 많이 나누어 주었다고 한 것 같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들은 강단에 올라오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그 카드를 가진 분들을 강단으로 부르려 합니다. 오래 기다리셨지만 아직 이른 시간입니다. 예전에는 이보다 더 더울 때도 춤추러 가서 밤새 머물지 않았습니까? 지옥에 간다면, 이렇게 더운 곳에 앉아 있을 기회라도 있으면 좋겠다고 할 것입니다. 그곳에는 선풍기도 없고 냉방도 안 됩니다. 들으십시오. 여기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한때 한 여자가 있었는데, 그 여자는 그분께서 자신을 누구라고 말씀하셨는지 그대로 믿었습니다. 무리 사이로 살며시 들어가 그분의 옷에 손을 대고, 저쪽으로 가서 앉았든 서 있었든, 어쨌든 그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멈추셨습니다. 이제 잘 들으십시오. 예수님께서 멈추시고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그분께 핀잔을 주었습니다. 저는 베드로가 이런 말을 했을 것이라고 상상합니다. “주님, 제 눈 좀 보십시오. 무슨 일이십니까? 누가 손을 대었느냐고요? 여기서 적어도 천 명은 주님의 등을 두드리고 손을 잡고 있는데, 대체 왜 그러십니까?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라니, 무슨 일이십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약해진 것을 아노라.”라고 하셨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에는 “내게서 효능이 나갔다.”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효능’은 ‘힘’입니다. “내가 약해졌느니라. 내게서 무언가가 나갔느니라.”
오, 형제님, 하나님의 교회나 하나님의 성회, 일신교나 이신교, 삼신교나 상호의존 교회, 혹은 침례교나 감리교에 속해 있다는 생각에만 매이지 마십시오. 그 여자가 손을 댔던 그런 손길로 그분께 손을 대십시오. 그 여자가 그분께 손을 대자 그분은 “내가 약해졌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사우스캐롤라이나에 사는 여러분도 그런 손길로 그분께 손을 대야 합니다. “내가 약해졌느니라.” 그분께서는 둘러보셨지만 찾지 못하셨습니다. 아시겠습니까? 그 여자의 믿음이 끌어당기고 있었습니다. 그분께서는 회중 가운데를 보시고 그 여자의 상태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여자는 혈루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맞습니까? 그것이 어제의 예수님이셨습니다.
성경을 읽는 분들 가운데, 신약의 히브리서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바로 이 순간에도 우리의 연약함의 감정을 느끼실 수 있는 대제사장이시라고 말하는 것을 아는 분이 얼마나 됩니까? 그분께서 우리의 연약함의 감정을 느끼실 수 있는 대제사장이시고, 그때와 동일한 대제사장이시라면, 동일한 대제사장이심을 입증하기 위해 그때와 똑같이 행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른 방식으로 행하신다면 다른 대제사장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일한 분이라면 동일하게 행하셔야 합니다. 그렇지요? 그분께서 오늘 밤 이 회중 가운데 오실지는 앞으로 10분이나 15분 안에 드러날 것입니다. 그분께서 이 회중 가운데 오셔서 동일한 예수님이 여기 계심을 입증하신다면, 그분을 전혀 알지 못했던 분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분이 “저는 그분을 저의 구주로 받아들이겠습니다.”라고 하시겠습니까? 또 그분을 아는 분들은 “더 사랑할 수 있다면 그분을 더 사랑하겠습니다.”라고 하시겠습니까? 손을 들어 보십시오... [녹음 공백.]
기도하겠습니다. 주 하나님, 덥고 땀이 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한때 세 사람에게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려 주시려고 불타는 용광로 속으로 내려가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결코 실패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아버지, 오늘 밤 이 신실한 무리에게 갚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이 더운 건물 안에 앉아 부채질하는 이들, 어린 아기들에게 땀이 흘러 그 작은 이마를 닦아 주는 이들, 연로하고 병든 아버지들, 저기 병들어 누워 있는 늙은 어머니... 어린아이들... 주님, 그들은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로 앞에 도움이 있다는 것을 그들 속의 무언가가 말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막을 헤치며 물 있는 곳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누구든지 그분을 믿는 자가 멸망하지 않고 생명수를 값없이 찾게 하려 하심이라.”
오, 주님, 오늘 밤 그분을 우리 가운데 보내 주옵소서. 메마른 땅의 반석, 폭풍 속의 피난처로 보내 주옵소서. 어제 계셨고 오늘도 동일하시며 영원토록 동일하실 예수님을 보내 주옵소서. 주님, 이들은 주님의 가지들입니다. 포도나무이신 주님께서 오늘 밤 주님의 영으로 힘을 공급해 주옵소서. 사람들 안으로 들어와 역사해 주옵소서. 주님, 제게 오셔서 저를 도와주옵소서. 주님께서 주신 은사를, 제가 제 자신을 내어 맡길 때 사람들 앞에 나타내 주옵소서. 주님께서 저를 통해 아무리 많이 역사하셔도 사람들이 믿지 않으면 결코 효력이 없을 것입니다. 그분께서 자신의 고향에 오셨을 때, 그들의 불신 때문에 능력 있는 일들을 많이 행하실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그린빌에서는 그렇게 되지 않게 하옵소서. 오늘 밤 여기 모인 이 작은 무리가 주 예수님을, 그분의 권능과 부활 가운데 보게 하옵소서. 오늘 밤 이 건물을 떠나 집으로 가는 길에 사람들이 엠마오에서 왔던 이들과 같이 말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죽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다시 일어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하루 종일 그들과 이야기하셨지만 그들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 그들하고만 함께 계시며 문을 닫으셨을 때, 다른 어떤 사람도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어떤 일을 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하셨던 바로 그 방식으로 그들 앞에서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들은 그분이 동일한 예수님이심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마음도 발걸음도 가볍게 제자들에게 달려가 말했습니다. “참으로 주 예수님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셨다. 그분께서 길에서 우리와 말씀하실 때에 우리 마음이 우리 속에서 뜨겁지 아니하더냐!”
주님, 오늘 밤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그렇게 말하게 하옵소서. 이 건물을 떠날 때 “그분께서 길에서 우리와 말씀하실 때에 우리 마음이 우리 속에서 뜨겁지 아니하더냐!”라고 말하게 하옵소서. 그리고 주님, 유대인의 시대와 사마리아인의 시대가 끝날 때 하셨던 그대로, 오늘 밤 이 이방인의 시대에 지금 여기서 어떤 일을 행하여 주옵소서. 주님, 저는 참으로 온 마음을 다해 제가 아는 최선의 방법으로, 우리가 끝에 이르렀음을 사람들에게 설명했습니다. 그들은 이것이 누군가 꾸며 낸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임을 압니다. 주님, 이루어 주옵소서. 주님께서 다른 곳에 계신다는 생각, 또 존재하지 않으신다는 생각에 그들의 정신이 마비되지 않게 하옵소서. 주님께서는 동일하시며 치유는 갈보리에서 이미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주님께서 한 약속을 지키신다면 모든 약속을 지키십니다. 주님, 큰일들이 이루어지도록 허락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합니다. 아멘.
여러분의 친절에 감사드립니다. 제가 아는 한에서 최선을 다해 설명하느라 거의 45분, 아니, 그보다 더 오래 걸렸는데, 이 시간 내내 여기 앉아 계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갚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저곳으로 걸어가 병자 한 사람을 고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믿으십니까? 저는 분명히 그렇게 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제가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해서 혼자 지내기만 하려는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친구 여러분, 사람의 종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종일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의 종이 되어 여러분을 사랑하고 섬기려면 저는 사람들에게서 떨어져 있어야 합니다. 저 강 건너편에 가면 함께할 시간이 충분히 있을 것입니다. 모든 시대의 사람들이 함께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빛이 있는 동안에는 도우려고 싸우고, 움직일 수 있는 매 순간마다 움직여야 합니다. 그러려면 떨어져 지내며 기도하고, 이곳에 올 때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보통은 집회 담당자가 함께 와서 설교를 맡습니다. 저는 방에서 곧장 강단으로 옵니다. 그러면 집회의 효과가 훨씬 더 큽니다. 여기에는 그 역할을 맡을 사람이 없어서 제가 직접 맡아 아는 한에서 최선을 다해 설명해야 합니다. 저는 학식이 부족해서 설명도 잘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제가 아는 것은 확실히 압니다.
누군가 “학교를 어디까지 다니셨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7학년까지만 다녔습니다.” 하지만 7학년 책을 아주 많이 읽었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제가 아는 것은 확실히 압니다. 저는 그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셨다는 것을 압니다. 그분께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스어 단어를 분석하고 그런 일을 할 수는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내려오셔서 저를 어떻게 구원하셨는지는 압니다. 그것을 여러분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그만큼만 믿으시면 그리스어 단어 같은 것을 알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그분을 믿으십시오.
무슨 글자의 1번부터 100번까지였습니까? K, K의 1번부터 100번입니다. 한꺼번에 다 부를 수는 없으니 어디서부터든 부르겠습니다. 그냥 1번부터 시작합시다. K 1번을 가진 분은 얼른 손을 들어 보십시오. 만약 그럴 수 없다면... 여러분, 기도 카드를 가진 주변 분들을 잘 살펴 주십시오. 귀가 들리지 않는 분도 있고, 말을 못 하는 분도 있으며, 마비되어 움직일 수 없는 분도 있습니다. 번호를 부르면 안내위원들이 여기로 옮겨 드리겠습니다. K 1번, 그 번호가 확실히 맞습니까? 그렇다면 다른 곳에서 시작하겠습니다. 뭐라고요? 아, 죄송합니다. 좋습니다. K 1번, 가능하면 이쪽으로 오십시오. 여기 오는 이분입니까? K 1번. 2번, 2번을 가진 분은 손을 들어... 2번, 바로 여기입니다. 3번? 3번, 손을 들어 주십시오. 4번, K 4번, 손을 들어... 이 여자분입니까? 5번? 아시겠습니까? 여기를 경기장처럼 만들 수는 없습니다. 여기는 경기장이 아닙니다. 교회입니다. 교회로 쓰이고 있습니다.
K, 1, 2, 3, 4, K 5번은 누구십니까? 5번, 손을 들어 주시겠습니까? 위층에 계십니까? 이미 들어오셨군요. K 5번. 6번? 7번, 7번? 좋습니다. 8번, 9번, 9번, 10번. 조셉,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10번, 11번, 12번, 12번, 제가 놓쳤군요. K 12번, 12번... 옆 사람의 카드를 살펴보십시오. 혹시... 부인께서 가지고 계십니까? 좋습니다. 13번, 잘 보십시오. 귀가 들리지 않아 자기 번호를 부르는 소리를 못 듣는 분일 수 있습니다. 13번, 14번, 15번, 15번, 좋습니다. 16번, 16번, 17번, 18번, 19번, 보아하니 휠체어에 앉은 분이나 그런 분은 안 보입니다. 모두 걸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19번, 20번? 잠깐 거기서 멈춥시다. 더우니 한꺼번에 너무 많은 분이 서 있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이분들을 지나서 더 진행하게 되면 계속 차례로 나오십시오.
이제 크게 숨을 한번 들이쉬고 잠시 아주 경건하게 앉아 계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움직이지 마십시오. 잠시만 아주 경건하게 계십시오. [누군가 말한다. “T. C... T. C. 퍼킨스 목사님께 장거리 전화가 왔습니다. 뒤쪽 아래층입니다. T. C. 퍼킨스 목사님이 여기 계시면 내려가 주시기 바랍니다.”] 예, 알겠습니다. T. C. 퍼킨스 목사님께 전화가 왔습니다. 좋습니다. 좋습니다. 이분들이 줄을 세우는 동안 이 건물 안의 모든 분께 잠시 온전히 집중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됩니까? 손을 들어 보십시오. 어느 교회에 속해 계신지는 상관없습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누구에게든 낙인을 찍는 것을 좋아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저를 아는 분은 누구나 제가 소를 돌보는 일을 했다는 것을 압니다. 말을 아주 많이 탔습니다. 예전에 우리가 소를 모아 콜로라도의 아라파호 국유림으로 몰고 올라갈 때, 우리의 낙인은 삼각대 모양이었고 그라임스 씨의 낙인은 다이아몬드 T였습니다. 낙인 종류는 많았습니다. 그리고 소들이 되돌아가지 못하게 하는 울타리가 있었습니다. 그런 울타리가 무엇인지 아시는 분 있습니까? 소들이 숲 밖으로 다시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헤리퍼드 협회에서는 트러블섬강 계곡에 소를 놓아 길렀습니다. 우리는 강의 발원지 바로 옆에 있었습니다. 건초를 1톤 생산할 수 있으면 숲에 소 한 마리를 놓아 기를 수 있었습니다. 소에 자기 낙인이 찍혀 있고, 상공회의소에서 그 낙인을 사용할 권리를 받았다면 말입니다.
소들이 지나갈 때마다 산림 관리원이 와서 소의 수를 세곤 했습니다. 관리원마다 그랬습니다. 저는 여러 번 안장 앞의 돌출부에 다리를 걸치고 앉아 그들을 지켜보았습니다. 소들이 지나가면 관리원이 거기 서서 소들을 확인했는데, 낙인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혈통표를 살폈습니다. 그 목초지에 들어가는 소는 모두 등록된 헤리퍼드종이어야 했고, 그렇지 않으면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심판 때에도 그럴 것입니다. 감리교든 침례교든 무엇이든, 어떤 낙인을 달고 있는지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피를 증명하는 표입니다. 참으로 다시 태어난 그리스도인이 아니면 아무도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 속해 있든 상관없습니다. 그 낙인은 별 상관이 없고, 눈여겨보지도 않을 것입니다. 어떤 피를 지녔느냐가 중요합니다.
이제 많은... 좋습니다. 모두 줄에 들어갔습니까? 그분들 전부 줄을 섰습니까? 잠깐 이쪽을 보십시오. 모두 경건한 마음으로 앉아 주시기 바랍니다. 저기 계신 분들 가운데, 위층이든 어디든, 병이 있는데 기도 카드는 없고 하나님께서 고쳐 주시기를 바라는 분이 얼마나 됩니까? 손을 들어 보십시오. 좋습니다. 잘되었습니다. 치유 집회를 하기로 한 것이 지혜로운 결정이었군요. 저기 기도 카드가 없고 하나님께서 고쳐 주시기를 바라는 분들은 손을 들어 보십시오. 대체로 얼마나 되는지 알고 싶어서 그럽니다. 헤아릴 방법이 없군요. 어디에나 있습니다. 좋습니다. 여러분은 여기로 부르지 않을 것입니다. 기도 카드는 이것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은 그저 사람들을 줄 세우고 성령께서 회중 가운데 역사하시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성령께서 오셔서, 어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이곳에 계실 때 하셨던 바로 그 일들을 똑같이 행하신다면, 얼마나 많은 분이 그분을 믿으시겠습니까?
주의 천사의 사진을 보신 분이 얼마나 됩니까? 제 생각에는... 진과 리오가 그것을 여기 가져왔습니까? 있습니까? 보신 분이 얼마나 됩니까? 손을 들어 보십시오. 그것이 이스라엘 자손을 인도했던 바로 그 불기둥이라고 믿는 분이 얼마나 됩니까? 예수님께서 지금은 불기둥으로 변하셨다고 믿으십니까? 여러분이 얼마나 잘 배웠는지 보고 싶어서 그럽니다. 제가 보여 드리겠습니다. 그분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인도하셨던 주의 천사, 그 불기둥이셨음을 아는 분이 얼마나 됩니까? 손을 들어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있기 전에 내가 있느니라.” 그 후 하나님께서 육체 안에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셔서 세상을 자신과 화해하게 하셨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좋습니다. 그분께서는 “나는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하나님께로 가노라.”라고 하셨습니다. 맞습니까? “나는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하나님께로 가노라.” 그러므로 그분께서 불기둥에서 오셨다면 다시 불기둥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여러분은 “목사님, 그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닙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성경을 모른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그를 쓰러뜨린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그의 눈까지 멀게 한 큰 빛이었습니다. 곁에 있던 사람들은 그 빛을 보지 못했지만 바울은 보았습니다. 그에게는 너무나 실제적인 빛이어서 눈이 멀었습니다. 그분께서는 “사울아, 사울아, 가시 채를 걷어차기가 네게 고생이라.”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이 “주여, 누구시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분께서는 뭐라고 하셨습니까? “나는 예수라.” 그 빛입니다. “나는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노라.” 맞습니까?
베드로가 감옥에 있을 때 주의 천사가 들어왔습니다. 그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빛, 불기둥이었습니다. 보십시오. 유대인의 시대가 끝날 때 그것과 함께 끝났습니다. 지금은 이방인의 시대가 끝나는 때입니다. 바로 그 불기둥이 여기에 있으며, 과학계에서 그 사진을 찍었습니다. 독일에서는 그것이 내려와 기름을 부은 뒤 다시 올라가는 모습을 찍었습니다. 스위스에서도 찍었습니다. 미국에서도 찍었습니다. 그것은 워싱턴 D.C.의 종교 예술관에 걸려 있으며, 온 세상에서 사진에 찍힌 유일한 초자연적 존재로 저작권이 등록되어 있습니다. FBI의 책임자 조지 J. 레이시는 뭐라고 했습니까? “브래넘 씨, 당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 사진이 별로 큰 인정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사람 숭배를 불러일으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잡화점에서도 팔릴 것입니다. 당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아닙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이것이 알려지도록 허락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제가 제 자신을 엘리야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점을 바로 이해하십시오. 사람들은 요한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제가 아니라 그분이십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오늘 여기 계십니다. 보십시오. 그분께서 신적 존재이시고, 그 빛이 그분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광야에서 인도하셨던 동일한 로고스이심을 과학계에 입증한다면 말입니다. 오늘 밤 교회 안에서 우리가 그분의 몸의 지체들이고 그 주의 천사가 여기 계신다면, 그것은 예수님 안에서 나타났던 것과 똑같은 생명을 나타낼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동일한 주님이 아닙니다. 그것이 동일한 로고스, 동일한 영, 예수님 안에 계셨던 동일한 하나님이시라면, 그것이 그분의 사진이고 그분께서 여기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계신다면, 동일한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분께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라.”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분명합니까? 이제 여기서 그것을 입증할 수 있습니다. 제가 아는 한 여기 계신 모든 분은 제가 모르는 분입니다. 제가 누구를 안다고, 정말 안다고 말씀드릴 수 있는 분은, 여기 이분이 어디선가 선교사로 일한다는 것은 압니다만... 제 집에 오셨었지요. 아랍인들, 그렇습니다. 아랍인들에게 가는 선교사입니다. 그 외에는 몇 분... 제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바로 여기 앉아 계신 분은 호주에서 오신 린 존스 형제님입니다. 오늘 오후에 호주 집회에 관해 저와 이야기하셨지요. 맨 끝자리에 앉아 계신 분도 압니다만 이름은 모릅니다. 아무튼 존스 형제님, 형제님이나 이분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는 제가 전혀 모르지요?
이 회중 가운데, 저쪽 회중석과 이 줄들 건너편과 위쪽에 계신 분들 중에 제가 여러분에 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아는 분이 얼마나 됩니까? 손을 들어 보십시오. 그렇다면 그것이 드러난다면 어떤 초자연적인 권능을 통해서여야 합니다. 그분께서 대제사장이시고 여러분이 아프다면... 지금 기도 카드가 없더라도 이 대제사장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하십시오. “주 하나님, 오늘 밤 행하여 주옵소서. 저는 주님의 옷에 손을 댔던 그 여자와 같은 믿음이 제게도 있다고 믿습니다. 이 사람이 말씀으로 입증해 주었습니다만, 문제는 제가 어떻게 그것을 아느냐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의 옷에 손을 대게 하옵소서. 그러면 영원히 확실해질 것입니다. 이 사람이 돌아보게 하시고, 주님께서 예수님의 음성을 사용하여 말씀하셨듯이 이 사람의 음성을 사용하여 말씀해 주옵소서. 그러면 제게는 영원히 확실해질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도전합니다. 회중 전체가 하나님을 시험하여 그분께서 실제로 계신지 알아보십시오. 형제님, 그것은 훌륭한 방법입니다. 그저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이제 움직이지 말고 아주 조용히 앉아 계십시오. 제가 어떤 자리에 서 있는지 아십니까? 제가 그분에 관해 한 말은 모두 좋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루어질까요? 여기 올라와 제 자리에 서고 싶은 분이 있다면 환영합니다. 좋습니다. 제가 왜 이런 말을 하겠습니까? 맡겨진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온 세상을 다녔습니다. 그분께서는 한 번도 저를 저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지금도 저를 저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분의 약속에 따른 일입니다. 제가 누군가를 고칠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은사가 하는 일은 오직 예수님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훌륭한 설교자는 말씀을 전하여 그분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훌륭한 교사는 그것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부활하신 그분을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말씀을 기록하신 분께서 2,000년 전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뒤에도 지금 여기 계시며, 말씀을 기록하신 바로 자신이 여기 계심을 보여 주신다면, 여러분은 분명 그분의 모든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분이 환자입니까, 아니, 이분입니까? 우리는 서로 모르는 사이입니다. 모두 제 말이 들립니까? 그리고 음향 담당자님, 이것을 잘... 환상 중에는 저는 전혀... 제가 어디에 있는지 모릅니다. 아시겠습니까? 그저 다른 세계에 있는 것입니다. 필요하면 소리를 높여 주십시오. 여기 제가 방금 설교한 요한복음 4장의 아름다운 장면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면... 여기 우물가의 여자처럼 제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여자가 있습니다. 저는 이분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일 수도 있고, 위선자일 수도 있고, 매춘부일 수도 있고, 정숙한 여자일 수도 있습니다. 병이 있을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서 있을 수도 있습니다. 재정적인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이분에 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아십니다. 저는 이분을 본 적이 없습니다. 여기 우리 둘이... 맹세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우리가 전에 만난 적이 없고 제가 부인을 모른다면 손을 듭시다. 손을 들어 보십시오. 전혀 아는 사이가 아니고 저는 이분에 관해 아무것도 모릅니다.
이것이 우물가의 여자 때처럼 남자와 여자가 만나는 장면이라면... 적어도 그만큼은 사실임을 인정하시는 분이 얼마나 됩니까? 이 여자에게 무슨 일이 있다면, 이 여자의 삶에 원하는 무엇인가가 있거나 이 여자에 관한 어떤 일이 있다면... 병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것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실 경우 이분이 직접 판단하게 합시다. 저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그렇게 하시면, 그것을 드러내는 어떤 초자연적인 권능이 여기 있음을 보여 줄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바리새인의 편에 서서 이 사람은 마귀에게 속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말은 조심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영을 가리켜 부정한 일이라고 하면 용서받지 못할 죄가 됩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런 말은 하지 마십시오. 이해가 되지 않으면 그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고 떠나십시오. 그러나 그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여러분은 그분의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마귀라고 믿으면 마귀의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저는 말씀과 제게 맡겨진 사명에만 책임이 있습니다. 이제 기도하고 계십시오.
저는 이 여자를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여기 나와서... 지금까지 설교만 했는데, 무언가가... 제가 예수님과 마지막 때에 관해 여러분에게 전한 이 모든 말씀, 제가 한 모든 설교가 지금 바로 거짓인지 참인지 드러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실제로 입증하시도록 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분은 싸움에 능하십니다. 이 여자가 그저 거짓으로 꾸미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십시오. 집회에 참석했다가 속이려는 자들이 강단에 올라와 그 자리에서 마비되어 쓰러지는 것을 본 분이 얼마나 됩니까? 사람들을 들어서 밖으로 옮겨야 했고, 그들은 아직도 마비되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정신을 잃고 완전히 미쳐서 시설에 수용되어 죽음을 맞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성령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분께서 그들에게 내리시는 저주는 영원히 남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이제 지켜보며 옳은지 아닌지 알아보십시오.
이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분의 영광을 위해 여기 있는 모든 영을 제 통제 아래 둡니다. 부인, 저는 부인을 모르고, 부인에 관해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러니 주 예수님께서 부인이 무엇 때문에 여기 왔는지, 무슨 일인지, 어떤 식으로든 제게 계시해 주신다면, 그것이 진실인지 아닌지 부인은 알 것입니다. 그분께서 그렇게 하시면 그분을 믿고 부인이 원하는 것을 그분께 받을 수 있다고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제가 부인을 모른다는 것은 아시지요. 그러나 그분은 아십니다. 회중 여러분이 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지금 이 여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느끼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볼 수 있다면, 바로 지금 저와 이 여자 사이에 그 빛이 서 있습니다. 여자가 제게서 멀어져 가고 있으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느끼고 있습니다. 참으로 온화하고 겸손한 느낌이 그 여자를 감싸고 있습니다. 그것이 맞으면 손을 들어 보십시오. 제 앞에 선다고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님을 아실 것입니다. 그분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분에 관해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분께서 실제로 계심을 압니다.
그렇습니다. 이 여자분은 시력을 잃어 가고 있어서 눈을 위해 제가 기도해 주기를 바라며 여기 왔습니다. 사실입니다. 맞습니다. 그렇지요? 여러분은 “그 여자는 안경을 쓰고 있으니 눈이라고 말한 것이겠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실제 문제가 있는 곳이 눈입니다. 그분께서 다른 것도 말씀해 주실지 모릅니다. 첫날 밤이니, 이런 집회에 한 번도 와 보지 않은 분이 얼마나 됩니까? 손을 들어 보십시오. 좋습니다. 하지만 제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말씀드린 것, 그분께서 바로 이런 일을 하셨다는 것은 믿으시지요? 손을 들어 보십시오. 이제 서두르지 않겠습니다. 아무도 다 마치지 못하더라도 그저 시간을 충분히 갖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부인. 눈의 신경이 죽어 가는 신경 문제 때문에 시력을 잃어 가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가슴도 두근거립니다. 주로 밤에 누우면 그렇습니다. 사실 심장 때문이 아니라 위에 찬 가스 때문입니다.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외에도, 제가 그분의 선지자, 아니, 그분의 종이라고 믿으십니까? 마음에 두고 기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자입니다. 그 여자가 죽어 가고 있습니다. 지금 그 여자 위에 검은 그림자가 있습니다. 여기 있지 않습니다. 부인의 친척입니다. 인척 관계인 자매분입니다. 오하이오에 삽니다. 맞습니다. “주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지만 부인은 오하이오에서 오지 않았습니다. 호수 근처의 큰 도시에서 왔습니다. 시카고입니다. 믿으십니까? 집으로 돌아가 믿으신 대로 된 것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인께 그것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아주 경건하게 계십시오. 지금 아주 경건하게 계십시오. 이리저리 움직이지 마십시오. 아주 경건하게 계십시오. 믿는 분이 얼마나 됩니까? 감사합니다. 그러면 이보다 더 큰 일들을 볼 것입니다. 믿겠다고 약속하십시오. 선생님, 우리는 서로 모르는 사이입니다. 제가 아는 한, 저는 평생 선생님을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서로 모르는 사이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둘을 아십니다. 여기 그 장면이 있습니다. 바로 전에 여기 있던 분은 여자였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제가 설교한 우물가의 여자의 장면이었습니다. 이제 여기 오는 사람은 빌립이 불러서 왔던 나다나엘과 같은 남자입니다. 지금 두 남자가 처음 만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경건하게 계셔 주십시오. 방금 회중 가운데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다. 선생님도 느끼십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느끼십니다. 저는 선생님의 형제입니다. 선생님은 그리스도인입니다. 선생님의 영이 반갑게 맞아 주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 신자입니다. 그리고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제가 기도해 주기를 바라는 문제는 머리에 있습니다. 맞습니다. 사실이면 손을 들어 보십시오. 지금 이것은 추측이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기억하십시오. 지금은 여러분의 생각을 숨길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아시고 꿰뚫어 보시는 그분께서 여기 계십니다. 그분께서 선생님께 무슨 말씀을 하셨든 진실이지요? 아, 무엇인지 보입니다. 한 여자가 자꾸 선생님 곁으로, 가까이 지나갑니다. 아내입니다. 아내도 여기 있습니다. 제가 선생님께 그 말씀을 드리자 아내의 믿음이 높아졌습니다. 아내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하나님께서 제게 알려 주실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제가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으로 그렇게 한다면 아내의 상태도 나은 것으로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아내에게 부어오른 곳이 있는데, 그것은... 아, 점액낭염입니다. 그리고 부비동염도 있습니다. 맞습니다. 선생님은 그리스도인일 뿐 아니라 설교자입니다. 이름은 카터 목사님입니다.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생님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
믿으십니까?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그분께서 그 약속을 지키신다면 모든 약속을 지키십니다. 이제 아주 경건하게 계십시오. 그분을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주님이십니다. 저를 여러분의 형제라고 믿으신다면 기억하십시오. 이것은 그분께서 하신 거룩한 약속입니다. 그분께서는 죽어 계시지 않습니다. 살아 계시며 이방인 교회에 동일한 표적들을 보여 주고 계십니다. 안녕하세요, 부인? 부인과 저는 서로 모르는 사이인 것 같군요. 주 예수님께서는 우리 둘을 아십니다. 회중 여러분, 아주 경건하게 계십시오. 이제 기도하고 계십시오. 저기 누군가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큰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계속 하나님께 “주님, 저 사람이 제게 말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구하십시오. 아주 경건하게 계십시오. 죄송합니다. 빛이 있는데, 저는 보이는 그 빛을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남자와 여자가 만났습니다. 저를 그분의 종이라고 믿으십니까? 제가 그분의 종이라면 제 주님에 관한 진실을 말합니다. 제가 제 주님에 관한 진실을 말한다면, 제 주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을 책임지셔야 합니다. 그것은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약속을 주셨고 우리는 그날에 살고 있습니다. 부인은 자기 자신을 위해 여기 온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왔습니다. 그 사람은 부인의 친척, 인척 관계인 자매분입니다. 그분은 이 도시에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아주 멀리, 해안 근처에 있습니다. 캘리포니아에 있으며 병원에 있습니다. 발에 문제가 있습니다. 발목입니다. 발목에 궤양이 있고 의사는 발을 잘라내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실입니다. 부인이 여기에 온 이유는, 제가 보니 부인이 서 있고 제가 부인 가까이에 서 있습니다. 부인 위에 검은 그림자가 있었습니다. 부인은 다른 곳에서 열린 제 집회에 있었으며 암을 앓아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는데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한 남자에 대한 짐을 지고 있습니다. 부인의 아버지입니다. 아버지가 담배를 끊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의 말씀이 이러하시다.”입니다.
친구여, 주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움직이지 말고 경건하게 계십시오. 안녕하세요? 우리는 서로 모르는 사이입니다. 저는 부인을 모르지만 하나님은 아십니다. 검은 그림자가 이 건물 안에서 계속 움직이고 있고 누군가 기도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제가 어디인지 찾지 못하겠습니다. 그저 아주 경건하게 계십시오. 주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렇지요? 무엇이 있고 무엇이 없는지 정확히 아십니다. 그런데 주 예수님께서 부인이 여기 온 이유를 제게 계시해 주신다면, 저를 그분의 종이라고 믿으시겠습니까? 그분께서 그렇게 하신다면... 제가 “병이 있으시군요.”라고 하고 손을 얹으며 “주님을 찬양합니다. 나으실 것입니다.”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도 괜찮을 수 있습니다. 부인에게는 그것을 믿을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부인의 지나온 삶으로 돌아가, 제가 전혀 모른다는 것을 부인도 아는 일을 찾아내신다면, 지나간 일을 아시는 그분께서는 틀림없이 앞으로 있을 일도 아실 것입니다. 지나간 일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부인이 판단할 것입니다. 그러면 저를 그분의 종으로 믿으신다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아는 것은 부인의 믿음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부인은 신경 질환으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정신적인 긴장에 더 가까운 것입니다. 마음이 불안하고, 속으로 여러 생각을 하며, 일이 닥치기도 전에 미리 걱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직장에도 문제가 있는데, 치질이라고 하는 병입니다. 다리에는 정맥류도 있습니다. 사실입니다. 그 말에 묘한 느낌이 드셨지요? 아신다면, 저를 그분의 선지자로 믿으신다면, 부인에게는 간질 발작을 일으키는 아들이 있고 그 아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제 저를 그분의 선지자로 믿으십니까? 집으로 돌아가 믿으신 대로 된 것을 보십시오. 그대로 될 것입니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저것이 보입니까? 저쪽 여자분 위에 빛이 머물러 있습니다. 암을 앓고 있습니다. 케이 부인, 저는 평생 부인을 본 적이 없지요? 부인에 관해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런데 거기 앉아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기도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에 손을 대셨습니까? 그분께 손을 대셨습니다. 부인은 이 도시에서 오지 않았습니다. 스파턴버그라는 곳에서 왔습니다. 맞습니다. 이 말들이 맞으면 손을 들어 보십시오. 집으로 돌아가 사십시오. 부인의 믿음이 부인을 낫게 합니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믿고 계십니까?
안녕하세요? 젊은이, 우리는 서로 모르는 사이입니다. 제가 아는 한 우리가 살면서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언젠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만날 것입니다. 우리가 한 모든 일에 대해 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분의 존엄하신 임재 앞에 서 있습니다. 주 하나님께서 청년이 여기 온 이유를 계시해 주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시며 제가 진실을 말한다는 것을 믿습니까? 영적인 문제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그뿐 아니라 설교자입니다. 젊은 설교자입니다. 다른 설교자가 여기로 보냈는데, 그 설교자는 조지아주 메이컨의 침례교 설교자입니다. 그는 신경쇠약으로 고통을 겪고 있으며 신경이 아주 예민합니다. 참, 그 설교자가 청년의 여비를 대어 여기 오게 했습니다. 제 앞에 서서 그를 위해 기도를 부탁하라고 말입니다. 맞습니다. 돌아가십시오. 두 분 다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에게 소식을 전하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낫게 해 주셨다고 말하십시오.
거기 앉아 계시는 동안 당뇨병이 떠났다고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기뻐하며 갈 길을 가십시오. 그저 믿으십시오. 바로 그때 심장병이 떠났다고 믿으십니까? 갈 길을 가며 기뻐하십시오. “주님, 감사합니다.”라고 말하십시오. 저기 양쪽에 탈장이 있는 어르신, 그분께서 어르신을 온전하게 하신다고 믿으십니까? 하나님께서 고쳐 주신다고 믿으십니까? 기도 카드가 있습니까? 기도 카드가 없습니까? 하지만 기도하고 계셨지요, 어르신? 양쪽에 탈장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고쳐 주신다고 믿으십니까? 손을 들어 보십시오. 좋습니다. 믿으시면 받으실 수 있습니다. 아멘. 그분이 무엇에 손을 대었습니까? 여러분의 믿음에 도전합니다. 믿으십시오. 네가 만일 믿을 수 있거든... 여기 앉아 있는 할머니... 아니, 중년의 여자분이 저를 보고 있습니다. 코에 종양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제가 볼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기도하고 계십니다. 조금 전에 기도 줄로 나오려다가 부인의 카드 차례가 아니어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온 마음을 다해 믿으신다면, 부인은 그것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피부암입니다. 그러나 온 마음을 다해 믿으시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고쳐 주실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받아들이고 집으로 돌아가 건강하게 지내십시오.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네가 만일 믿을 수 있거든...
저기 앉아 저를 보고 계신 남자분은 어떻습니까? 선생님, 위장병이 있습니다. 흰 셔츠를 입고 머리숱이 적은 분 말입니다. 기도 카드가 있습니까? 기도 카드가 없습니다. 저는 선생님을 모르지요? 하지만 거기 앉아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위의 소화 기능에 문제가 있어서 먹은 음식이 위에서 시어집니다. 가서 햄버거를 드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쳐 주십니다. 여러분의 믿음에 도전합니다. 믿으십시오. 바로 뒤쪽, 끝에서 두 번째에 앉아 있는 분, 암으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기도 카드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도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쳐 주십니다. 집으로 돌아가 믿으십시오. 의심하지 않으면 받을 수 있습니다. 부인,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가서 저녁을 드시겠습니까? 저분의 위장병이 고침을 받았을 때 부인도 같은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갈 길을 가며 기뻐하십시오. 먹고 즐거워하십시오. 주님을 찬양합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고침을 받았다고 믿으십니까? 외치며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강단에서 내려가십시오.
그분의 임재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님은 죽어 계시지 않습니다. 여기 계십니다. 그분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그분을 사랑하십니까? 그분을 믿으십니까? 여기에 믿는 분이 얼마나 됩니까? 성경은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들이 따르리니, 병든 사람들에게 안수하면 그 사람들이 나으리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서로에게 손을 얹으십시오. 그리스도께서 한 면에서 약속을 지키신다면 모든 면에서 지키십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동안 서로에게 손을 얹으십시오. 주 하나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든 마귀의 힘이 이 사람들을 놓아주도록 명합니다. 사탄아, 나와라. 너는 패배했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들을 놓아주어라. 모두 여기서 일어나 그분을 찬양하십시오.